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대학교 선후배 모임이 있다. 학내에서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선후배들이 서로 개별적으로 연락하고 지내다 아예 모임을 만들었다. 그 모임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다고 총무를 하라고 하더니 하는 김에 회장까지 하라고 해서 엉겁결에 모임의 회장이 되었다. 회장이라고 해봐야 모임 날짜 장소 정하고 돈 계산하는 일이 다다. 어느 날 그 모임으로부터 갑자기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또 이런 급번개 모임도 당황하지 않고 토 달지 않고 잘 나간다. 학창 시절 학생운동을 하던 이력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잘 움직인다.
누군가 술 생각이 났다 보다 하며 이유도 따지지도 묻지 않고 모인다.
식당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으려는데 먼저 와 있는 멤버 중에 낯선 아니 전에 없던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내 눈을 의심했다. M 선배였다. M 선배라면 지금 미국에 있어야 하는데 잠깐 귀국했구나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M 선배는 나를 보자 멋쩍게 웃었다. 나도 웃어 주고 싶었지만 나의 뇌리에서 웃어 주면 안 된다라고 제지했다. M선배가 반갑다고 손을 내밀었다. 손까지 뿌리 칠 수는 없어서 잡아 주었다.
"한국에 왔나요?"
"어, 3년 전에 들어왔어"
'뭐시라? 한국 들어온 지 3년이나 지났다고? 근데 난 왜 몰랐지? 아무도 알려 주지 않았군.'
살짝 꽤씸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그들이 왜 알려 주지 않았는지 알 거 같아 되려 민망했다.
'이 쉬쉬 하고 있구나 그런데 갑자기 3년 만에 왜 오픈한 거야?'
난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묘한 기분이 되어 버렸다.
그날 그 자리는 나와 M의 눈치를 보는 어색한 자리가 되었다. 겉으로는 모두 태연 한 척했지만 티가 안 날 수가 없었다. 모임이 끝날 무렵 M은 약간의 취기를 무기 삼아 호기롭게 내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가 번호를 주는지 안 주는지 눈치를 보는 장면이 순간 정지 한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선 듯 번호를 알려 주었다. 싸움을 걸지 않아 모두 안심하는 것 같았는데 착각은 아니었겠지.
그다음 날 바로 M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같이 차를 마시자고 했다. 할 얘기가 있다면서.
"할 얘기 없을 텐데'라고 하자 M은 (명칭 생략)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소 도살장 끌려 나가는 기분이 약간 들었지만 미국에서 20여 년 살다가 한국 온 지 3년이나 되었는데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단 둘이서 마주 하고 앉으니 믿기지가 않았다.
대학교 3년 선배. 학생운동을 하다가 만났다. 잘 챙겨 주길래 따르다가 자연스레 커플이 되었지만 남자를 사귄 건 M이 처음이었으므로 모든 면에서 상황 파악을 잘 못했다. 서툴렀다. 사람이 안 볼 때 손 잡는 게 다였다. 프렌치 키스도 한 번 안 했으니까 애인이었다고 해야 하나 사귀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어쨌든 자주 붙어 다녔으므로 남들이 볼 땐 깊은 사이로 오해했을 것이다.
붙어 다닌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M은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기 위해 그의 고향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때 M이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내게 물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M은 계속 만날 건지 헤어질 건지 결정하라고 했다.
그 말이 내게는 헤어지자는 말로 들렸다. 나의 의사를 묻는 말로 들리지 않았다.
사랑한다면 어디 어느 곳에 있는 게 무슨 상관이람!
오기 내지는 괜한 자존심이 발동해서 "헤어지자는 거잖아. 이 길로 서울로 간다면 다시는 날 만날 생각하지 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헤어지고 몇 달이 지났을 때 M에게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했는데도.
만나러 나간 자리에 M이 웬 여자와 같이 있었다. 아주 못생긴... M은 자기와 결혼할 여자라고 소개했다.
지금이야 "미친 거 아냐?"라고 화를 냈겠지만 그때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한 달 뒤쯤 M은 그 여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2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갑자기 강남의 한 카페에서 내 앞에 앉아 있다니...
하고 싶은 말이 뭔지 해 보시지요 라는 의미의 손짓을 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옛날에 네가 나를 너무 매몰차게 밀어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너를 잊어 본 적이 없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었다."미친 거 아냐? 나하고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 안 나?"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하며
"네가 서울로 올라가면 끝이라고 하길래 어쩔 수 없었어. 부모님이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했고 부모님이 소개 한 그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었어"라고 말했다.
"잘했어. 근데 이제 와서 왜 이러는 건데?"
"나 그 사람하고 이혼했어"
"응 그것도 잘했네"
나는 속으로 '이혼했구나 그런데 이혼하고서 나를 찾았다고? 어쩌자고?'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대학 시절과는 달리 M에게 끌리지 않은 걸 보면 그 당시 받은 충격이 엄청 컸던 모양이다.
그에게 깊은 불신이 생겨버린 것이다.
M은 그동안 미국에서 살아왔던 얘기를 주저리주저리 풀었지만 그것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얘기를 들어주다가 시간이 많이 지나 담에 또 보자는 말을 건네고 헤어졌다.
그는 그 후로도 가끔 전화를 걸어 사랑 고백을 했지만 시답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시크하게
"그냥 선후배로 가자. 아름답게." 라고 말했다.
남편에게 지병이 있었다. 간이 부어 있었다. 종국엔 간암 판정을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도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위암 그의 큰 형도 지금 위암 수술 후 요양 중이다.
남편은 자기 집안에 암 유전자가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암 불안증이 있었다. 건강에 신경을 아무리 쓴다 한들 유전자를 바꿀 수는 없으므로 항상 불안해했다. 그런데 유전자도 문제지만 성격도 문제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찌할 줄 몰랐다. 술과 담배로 풀었다. 거의 매일 술이 떡이 돼서 귀가했다. 이래서 힘들다 저래서 힘들다 하면서... 시아버지도 매일 술을 마셨는데 날이 갈수록 시아버지와 똑같이 닮아갔다. 걸음걸이며 말투까지.
남편은 스트레스를 술과 담배로만 푼 건 아니었다. 여자로도 풀었다. 만나는 여자가 많았다. 여자들이 잘 따랐다. 그 들 중 몇 명과 깊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죽기 얼마 전엔 한 여자한테 미친 듯이 빠져 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죽을 거야 라며 삶에 대항하는 것 같았다.
체면 따위도 차리지 않았다.
" 난 너한테 일도 애정이 없어 너는 나한테 여자도 아내도 아니야"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그는 이혼을 입에 올렸다. 결혼 후 7년쯤엔 이혼도 할 뻔했다. 내게 이혼할 마음이 없는 것을 안 뒤론 지능적으로 괴롭혔다. 내가 바라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한다거나 일부러 화를 유발한다거나 사람들 앞에서 특히 다른 여자들 앞에서 대놓고 나를 무시한다거나.
이혼 유발 행동들이다. 그래도 난 이혼 할 생각이 없었다.
두 아이가 유일한 낙이며 희망이었다. 이혼하기엔 애들이 너무 이뻤다. 그 예쁘고 착한 아이들이 새엄마의 손에서 큰다는 건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꼴을 보느니 차리리 죽는 게 나았다.
그래서 남편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내가 망가지더라도 아이들 만은 고스란히 지켜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애를 썼음에도 아이들을 완벽히 지켜내지 못했다.
남편이 싸움을 걸어올 때마다 맥없이 말려 들어갔고 휘둘렸다. 싸우기 싫어도 싸울 수밖에 없었다.
둘이 싸울 때 아이들은 잘잘못을 가릴 수가 없었다.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엄마도 아빠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똑같이 잘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붙잡고 아빠가 이랬다 저랬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이들한테는 아빠의 존재가 필요했다. 좋든 나쁜 든...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게 하는 것도 못할 짓이었기 때문에 모든 상황으로 볼 때 나만 참으면 될 문제였다.
남편이 사람들 앞에서는 매우 젠틀하게 행동해서 밖에서는 남편의 이중성격을 알 수 없었다. 내가 떠벌리지 않는 이상...
언젠가부터는 뭔가 작전이 바뀌었다. 자기가 마치 애처가인 것처럼 행동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 칭찬을 한다거나 내 눈치를 보며 비위를 맞추어 준다거나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또 많은 사람들은 남편이 정말로 애처가인 줄 알았다.
한 번은 남편이 와치를 집에 놓고 갔다.
이런 일이 없었는데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나 하며 와치를 들고 무심코 화면을 터치 하자 불륜녀와 톡 대화를 나누는 화면이 떴다.
출근하자마자 불륜녀와 대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대화 내용 중에 불륜녀의 생일 얘기가 나왔다.
내 생일은 월요일인데 언제 만날까요?라고 여자가 묻자 남편은 토, 일, 월 다 만나 그리고 생일 파티는 토요일에 해줄게라고 답을 했다.
톡 내용을 불륜 증거로 캡처만 해 놓았지 그것으로 협박이나 고소나 싸움을 걸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싸움도 하고 싶지 않았다.
"너 아직도 젊고 이뻐. 너도 나가서 다른 남자 좀 만나고 다녀"
"상간녀 소송 한다며 왜 안 해? 돈이 목적이야"
라고 말하는 철면피인데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두려웠다.
남편은 누구한테 피해를 입으면 원수같이 미워하고 대놓고 무시하곤 했다. 자기 앞에 아무도 서 있지 않아야 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 자기의 적이었다. 심지어 자기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도 옷차림이 맘에 안 든다고 싫어했다.
낮과 밤을 그리고 집 안과 밖에서 완전히 딴 사람처럼 살았다. 어느 게 진짜 그의 모습일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 보기엔 그 자신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누군지 모르고 살다가 갔을 수 있다.
불행은 겹쳐서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말이 있다.
남편의 이상 행동이 점점 심해지던 시기 (바람피우느라 정신을 못 차릴 즘) 모텔 사업을 하던 친정이 부도가 났다. 2~3년 전부터 사업이 어렵다는 걸 알았지만 아버지가 공개를 하지 않는 바람에 일이 이런 지경에 이를 줄 몰랐다. 아버지는 혼자서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고 상황을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았다. 70대 노인이 혼자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어서 5층 짜리 모텔 건물이 고스란히 은행으로 넘어갔고 부모님은 자식들이 마련해 준 15평 아파트로 허겁지겁 옮겼다. 모텔 1층 부모님 살림 집에 있던 물건만 겨우 챙겨 나올 수 있었다. 파산이 이렇게 가혹하단 사실도 당하고야 알았다. 말 그대로 정말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쫓겼다.
그 일을 겪고 부모님은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자식들이 여러모로 보살펴 드려도 기력이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아버지의 병환이 심상치 않았다. 자식들에게 물려주려 했던 평생 일군 재산을 모두 날리자 그 허망함에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런 차에 아버지도 사위의 불륜 소식을 알게 되었다. 자식들이 아무리 쉬쉬해도 당장 집안이 쑥대밭이 됐는데 사위가 콧베기도 안 보이니 사위가 처갓집에 안 오는 이유가 바람난 게 아니라면 뭐가 또 있겠는지 노인네가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모를 수가 있을까. 친정에 간 어느 날 아버지가 날 불렀다.
" 선희 어미 이리 와 바라."
아버지의 굳은 표정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왠지 사위에 대해 물어보려는 게 아닐까 불안했다. 아닌 게 아니었다.
"박서방 바람났냐?"
눈치를 살피거나 돌려서 말하지 않는 성격이시다. 준비할 틈도 없이 훅 들어온다.
"예"
나로서도 감추거나 돌려 말하고 않았다. 사위가 친정에 나타나지 않는 적절한 거짓말을 갑자기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아니 진작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큰 침을 꿀꺽 삼키셨다.
"너 하고 살기 싫다더냐?" 다시 물으셨다.
"네"
"그럼 내쫓아라. 네가 나가지 많고 선희 아비를 내쫓아라"
"네. 그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안심 아닌 안심을 시켜 드렸다.
아버지의 당부 말씀은 결국 내게 유언이 되었다.
그 후론 사위에 대해 더 이상 궁금해하지도 묻지도 않으셨다. 친정에 가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힘 빠진 눈동자로 입을 꾹 다문 채 가족들의 움직임 만을 응시했다. 안 그래도 말이 없어 중요한 말만 하시는 분이 그나마 없어지셨다. 서너 달 후에는 풍 맞은 것처럼 반신 마비가 왔다. 조금 더 후엔 숟가락도 못 들 지경이 되었다. 가족들은 날로 쇠하여지는 아버지의 건강에 당황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렇다.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른다. 아파도 애써 죽음과 연결 지어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죽음은 정말 갑자기 온다는 것이다. 건강이 나빴던 사람도 서서히 말라 가다가 죽음은 예기지 못한 순간에 급작스럽게 온다. 죽는 순간은 본인 밖에 모른다. 본인도 모를 수 있다.
내 생각엔 죽기 1~2초 전엔 알지 않을까 싶지만 알 수 없다.
엄마의 건강도 여의치 않았기에 아버지를 간호하기 힘들었다. 급기야 엄마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병원에서 밝혀진 병증은 오른쪽 다리에 염증이 생겨 점점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자식들한테 말도 안 하고 감당하고 있었다. 자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이러다 줄초상 나겠다 싶었다.
염증을 치료하고 부기를 내린 뒤 일주만에 퇴원한 엄마는 당분간 다리를 쓸 수 없었다. 될수록 걷지 말라는 의사의 권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의논한 끝에 일단 엄마를 아버지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한 달 정도만 요양원에 계시도록 했다. 한 달만 계시라고 엄마 치료가 끝나면 모시고 오겠다고 아버지를 설득했다. 상황이 절박한지라 아버지도 기꺼이 동의했다.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아버지가 요양원엔 절대 안 가겠다고 하면 우리는 그때부터 또 차원의 고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 보기엔 재산을 말아먹어 자식들한테 물려줄 것도 없는데 막판에 부담이라도 덜어 주자는 마음인 것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이 사실에 우린 가슴이 더 아팠다.
'아버지 그냥 그때 안 가겠다고 하시지 그랬어...' 우리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다.
집 근처 시설이 비교적 깨끗한 요양원에 아버지를 모시고 가 입원 수속을 하고 요양사의 안내로 정해 진 방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방이었다. 조금 불편하겠지만 두 사람 다 워낙 연로하니 큰 말썽은 없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체념하는 눈치였고 한 달만 견디자고 다짐하는 듯 보였다.
아버지를 침대에 누여 드리고 옷가지를 정해진 서랍장에 정리해 놓았다.
"아버지, 한 달만 참으세요. 한 달만."
눈을 감고 있는 아버지의 두 손을 꼭 잡고 간곡히 부탁했다.
아버지는 대답은 안 하고 고개만 살짝 힘없이 끄덕였다.
서운함 서러움 불안함 등을 애써 누루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지만 당장은 이게 최선이었다. 아버지가 한 달만 견디면 가족 모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필이면 왜 내가 아버지를 요양원에 입원시켜 드리고 왔을까. 너무 마음이 무겁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불쌍해서 뒤 돌아 나오는데 가슴이 아렸다. 불행은 왜 한꺼번에 밀려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