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복수
프롤로그
진실되고 떳떳하다면 말이 필요 없거나 줄거나 반면, 변명을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말이 많아지거나 제스처가 분주해진다.
어떤 일에 대해 판단이 어렵다면 그 사람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태도를 종합적으로 관찰해야 한다. 주변의 평판도 좀 들어 보고... 이렇게 해도 모호할 때가 있긴 한데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아니면 본인의 판단력에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한다. 이것도 아니라면 상대방을 허물을 무조건 덮어 주고 싶거나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 일 수 있다.
올여름은 그 어느 해 보다 더웠다.
날씨가 더운 건지 인생이 순조롭지 않으니 날씨마저 덮게 느껴지는 건지 그 둘 다 인지... 경계 주변은 항상 모호하고 알쏭달쏭하다.
경계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선을 분명하게 긋고 싶지 않은 것일 지도 모른다. 선을 그었다기 낭패를 본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이다. 선을 넘거나 뭉개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 십의 시간이 흐르고 나니 옛말 틀린 게 하나도 없단 말 자체에도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지만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내지는 '진실은 언젠간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은 정말이지 진리에 가깝다 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그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얼마나 흥분되고 짜릿한지는 겪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강원도로 가야겠다고 그곳에서 인생 2막을 살아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기까지 많은 시간과 예행연습이 필요했다. 그 과정에서 다행히도 실패는 없었다. 오히려 너무나 순조로워 신을 섬기는 나로서는 그분의 도움이라고 밖에 믿을 수 없었다.
강원도로 가기 전에 강화도에서 8년을 살았다. (계획이 아니었는데 강화도에서 살았던 경험이 저절로 예행연습이 되었다.) 처음부터 강원도에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그때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도시 근교의 강화도를 택했는데 모든 여건이 착착 맞아떨어지며 한 달 만에 강화도로 집을 옮겼다. 이사를 하고 햇볕 좋은 날 마루를 닦다가 깜짝 놀랐다. 여기가 도시의 아파트가 아니고 시골의 전원주택이라는 사실에... 마치 순간 이동을 한 것 같았다.
그때도 신을 떠올렸다. 신이 도왔다고 내 힘으로는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할 수 없다며...
나는 잘 되는 일은 신에게로 안 되는 일은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에 익숙해 있다.
할아버지의 포도밭에서 태어나 5~6세 때까지 살았던 후로는 줄곧 도시에서 살았기 때문에 시골 생활 경험은 전무하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40대 중반에 시골로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었고 주위 사람들이 어찌나 놀라던지 그들의 우려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그때 지인들끼리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 나 올 시기가 6개월이다 1년이다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들의 우려와 내기가 무색하게도 거기서 8년을 살았다. 8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은데 말이다. 그것도 경험도 없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시골에서 말이지...
그만큼 재밌거나 매력이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지로 거기서 살 때를 전 후로 비교해 보면 도시에서 살 때 보다 훨씬 행복했다. 인생의 황금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우선 햇빛이 너무 좋았다 그다음엔 신선하고 맑은 공기 그다음엔 여유와 평화로움 마지막이 자연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마지막은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이웃이 놓고 간 가지며 호박을 들었을 때의 살짝 뭉클한 느낌...
내가 살던 전원주택 옆에 100평 남짓한 이웃집 텃밭이 있었는데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밤낮으로 풀 한 포기 없이 어찌나 정갈하게 가꾸던지 경탄스러웠다. 그곳에 마늘 양파 고추를 주로 경작하고 그 외 갖가지 야채를 조금씩 골고루 심어 먹었다. 내 신조 가운데 하나가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인데 그때는 그렇게 탐날 수가 없었다. 먹거리가 아니라 잡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잘 가꾸어진 텃밭 자체가 넘 탐이 났다. 가로 세로줄과 간격에 맞춰 그렇게 정확하게 식물이 자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그래서 자연이 무질서하고 방만하다는 편견이 깨졌다.
그 텃밭 주인인 며느리는 60대 초반이었는데 낮에는 텃밭이나 꽃밭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집 가까이에 있는 인삼차 가루를 티백에 담아 포장하는 공장에 다니고( 나중엔 이 공장을 함께 다니게 된다.) 한 달에 한두 번은 서울이나 일산으로 쇼핑을 가거나 영화, 뮤지컬을 보러 갔다. 그리고 일 년에 한두 번은 가족이나 친구와 해외여행을 다녔다.
그녀를 알고 그녀의 생활을 알게 되면서 난 저으기 놀랐다. 시골생활이 이렇게 여유롭고 풍요롭단 말인가 하며. 강화도에서 살면서 시골 생활에 대한 무지한 편견은 하나하나 깨져 나갔고 막연한 두려움도 빠르게 물러갔다. 시간이 갈수록 잘 왔다는 생각을 했고 만족스러운 만큼 적응도 잘해 나갔다.
전원생활을 하기 위해 귀촌이나 귀농을 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제일 큰 어려움을 지역 '텃세'라고 한다. 농사나 밭일이 고되어도 이웃과 잘 지내면 품앗이를 하면서 재미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센 이웃 특히 텃세 부리는 이웃과 가까이 살면 정말 이지 일상이 쉽지 않다.
모든 면에서 경계가 모호한 시골에서 경계를 세우려 하는 순간 환상이 무참히 깨져 버린다. 부동산을 구입할 당시엔 아무도 이곳의 커뮤니티에 대해 귀띔해 주지 않는다. 겉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부동산만 보고 구입하고 뒤늦게 당하고 나면 후회도 복구도 어렵다. 이웃의 텃세가 너무 힘들어서 매일 울다가 겨우겨우 집을 팔고 나갔다는 소문도 여러 번 들었다. 이웃과 관계를 단절하고 드문 불출 산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고...
시골생활에서 제일 힘든 건 텃세와 노동이다.
노동은 자기가 조절을 할 수 있다. 밭의 크기로 조절하면 되니까 그러나 텃세는 자기 뜻대로 조절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이웃이 걸면 휘둘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사이가 나빠지면 원수도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다 싶은 정도로 미워한다. 그런데 텃세를 안 당하는 정말 간단한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알았던 건 아니었는데 강화도 안에서 세 곳을 옮겨 다녔어도 텃세를 안 당했으므로 이 방법 때문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그것은 '인사'였다. 동네에서 누구를 만나든 먼저 인사를 했다. 환하게 웃으며. 웃는 얼굴에 침을 어찌한다며 그래서 그런지 몇 번 인사를 하고 나면 도시사람들 보다 더 쉽게 빨리 다가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시에서는 아무리 인사를 해도 형식과 예의에 그친다. 나중에 강원도에서 살 때도 텃세를 전혀 겪지 않았다. 텃세가 없는 시골 생활은 평화와 자유로음 그 자체다. 어떤 어려움도 이웃 주민들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다. 거기에 자연까지 더해지면 천국이 따로 없다.
강화도에서 살고부터는 모든 것을 다 바꾸어야 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생각도 생활도 사람도 그곳에 맞춰야 하루라도 편하게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선 그곳 생활 자체가 도시에서의 습관을 용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바꾸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도록...
처음엔 신선하다. 새 인생을 사는 거 같아서 그런데 계속 이 기분을 가져가려면 도시에서 살던 습관을 버려야 한다.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면 망한다. tv나 인터넷 또 핸드폰과 친하면 안 된다. 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가므로 한가하게 그런 것들을 들여다볼 시간도 여유도 없다.
시골에 살면서 처음에 이상했던 점은 마을에서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사람이 안보였다. 다 어디 갔나
집에 틀어박혀 있나 그러면 농사는 언제 짓는 거야 그런데 꽃밭엔 아름다운 꽃이 계절 따라 피고 논과 밭엔 언제 심었는지도 모르게 작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농사는 새벽 일찍부터 나와서 짓고 낮에 집에서 쉬고 저녁 무렵 잠깐 둘러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사람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시골에서 잘 살려면 농작물과 자연의 주기에 나를 맞추는 게 중요한데 이걸 못 따라가면 일 년 농사를 망친다고 보면 된다.
처음 1년 간 그 집(이제부터는 하얀 집이라고 부르겠다. 주택 외장이 하얀색 플라스틱 패널 외장재였다.)에서 살 때는 텃밭이나 꽃밭을 가꾸지 않았다. 집주인이 심어 놓을 것들을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정리하는 정도였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남아돌았다. 이웃과도 사귀지 않았고 도시의 친구들과는 점점 연락이 끊어지고 그러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대부분 책을 읽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일주일에 한 번 도시에 있는 교회를 가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8년을 지내는 동안 거의 빠지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에 참석했다. 나중에 친하게 지내게 된 이웃이 있었는데 그 언니가 나와 같이 교회를 가고 싶었다고 고백해 주었다. 만약 내가 다니던 교회가 강화도에 있었다면 자기도 나갔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의 감동이라니... 그 언니가 불교 신자였기 때문에 더 감동했던 거 같다. 그렇게 까지 나를 좋아해 준 사람이었는데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고 미안했다. 알면서도 못하니까... 나는 관계에 중독된 사람도 관계지향적인 사람도 아니다. 오히려 관계가 넓어지면 피곤해하는 사람이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혼자 사는 것에 익숙하다. 그런 성격이 어느 지역에 더 맞고 안 맞는 것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지역 특성을 떠나 내 성격이 그리 나쁜 것은 아니었다.
10월 초경이 강화도가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골 살이를 강화도에서 하고자 왔을 때가 그때였다. 땡볕이 물러가고 살짝 찬 기운 섞인 바람이 솔솔 불 때 나뭇잎에 약간 노랗고 빨간 기가 얼핏 돌며, 기세등등하던 풀들이 힘을 잃었음이 완연할 때, 그때의 강화도를 보고 살고자 결정했으니까.
40대 후반에 갑자기 시골에 가서 살겠다고 하니까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며 마치 유배나 보내는 것처럼 걱정하고 불안해하던 친지 자안들 때문에 너무 무모한 짓인가 내가 너무 독특한 사람인가 하며 살짝 흔들렸었다. 그런데 막상 강화도에 들어와 보니 이미 오래전부터 귀농귀촌 해서 자리를 잡고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의외로 많았다. 어찌 보면 내가 늦게 입성한 셈일 정도였다.
5년 정도만 더 일찍 들어왔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들어 올 당시 귀농귀촌 붐이 일어부동산 가격이 많이 올라 있었다. 강화도는 도시와 가까워 문화생활 하기도 좋고 수도권에 근접한 시골 중 이만한 운치가 있는 곳이 드물었기 때문에 인기가 많아 부동산 가격이 날로 날로 올르고 있던 중이었다.
처음엔 전세 집을 얻었다. 덜컥 집부터 사기 불안했기 때문이다. 150평의 대지에 건평이 35평 정도였고 20평 정도의 작은 비닐하우스 텃밭이 딸려 있고 마당엔 잔디가 깔려 있는 하얀 조립식 주택이었다.
동남향이어서 햇빛도 잘 들어오고 큰 길가에서 뒷산 쪽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어 조용하고 아늑했다. 이웃집들이 50m 정도로 대여섯 채 정도 적당히 떨어져 있었고 이 이웃엔 70~80 정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살았으며 혼자 사시는 분도 있고 딸 손주와 함께 사는 대가족도 있었다.
시계가 90년대로 돌아간 듯한 작은 마을에서 귀촌이 아니 귀촌 예행연습이 그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