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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an 07. 2024

2. 한 번 어른거린 아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에겐 너무 가혹한 그의 소망

남편은 몇 달간 아이 이야기를 꾹꾹 삼켰다고 한다.


하지만 천륜의 연이 그를 끌어당긴 것인지 결국은 원통함을 내게 표출하였다.


그래! 나 아이가 갖고 싶어. 자기를 닮은 딸 한 명만.... 세상 아무 아이나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딸 하나 갖고 싶어. 자꾸 어른거리는 걸 어떡해. 어떻게 낳고 키워야할지 생각하면 무섭지만, 그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 그게 죄는 아니잖아.


나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나: 지금 아이 낳으면 나 대학원은 휴학해? 휴학하면 나 한국 돌아가야 하는데...? 그건 괜찮아?

남편: 모르겠어...

나: 한국은 미세먼지 많고 사람들이 학벌이나 외모로 사람을 평가해서 싫다면서. 나 공무원인 것도 싫다면서. 새로운 직업 가질 수 있도록 공부 열심히 해보라고 한 것도 당신이잖아. 갑자기 아이가 갖고 싶다고 하면 어떡해...?

남편: 당장 갖자는 건 아니야. 당연히 자기 학업도 지속해야지. 그런데 자기가 지금 만으로 35세 잖아. 이제는 임신하려고 노력해도 잘 안된다는데.. 노력은 해볼 수도 있잖아..?

나: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딨어? 그러다가 덜컥 생기면 그 때가서 이것저것 닥치는대로 해결하자고? 난 지금 그럴 여유가 없어.


나는 풀브라이트 유학생 신분이라 유학이 끝나면 무조건 2년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남편은 영주권자이지만 2년 본국 거주요건을 채우지 못하는 이상 나는 학생비자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무원 유학휴직 중이었기에 휴직사유가 소멸되면 즉각 복직을 해야 한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수도 있겠지만, 남편이 꿈꿨던 공무원 탈출은 어려워질 것이다. 아이를 갖고 대학원 공부를 하고 새 직장을 찾는 일은,, 글쎄, 다른 사람들은 할 수도 있겠지만 미국에서 영어로 고생 중인 내게는 버거운 일이었다.





우리가 한국에 살지, 미국에 살지를 두고도 이미 오랜 기간 갈등을 해온 터였다.


남편을 만나기 전 나는 3년 만에 박사를 졸업한 후 공무원 복직을 할 계획으로 미국에 왔었다. 결혼 전에 "한국이든 미국이든 상관 없어!"라고 하면서 내게 마음의 평안을 주었던 그는, 결혼 후 오로지 미국만을 고수하는 고집불통이 되어갔다.


한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게임업계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려보니 한국 노동시장은 거의 헬게이트에 가깝다는 그의 판단이었다. 끝없는 크런치, 적은 임금, 긴 통근 시간, 드문 원격 근무, 불필요한 사내정치, 아트 디렉션에 대한 경영진의 몰상식한 개입 (모 게임사는 회장의 아들이 플레이해보고 싫어하면 게임 프로젝트를 엎는다고 했다) 등등등등.


내가 일했던 아웃백에서도 저런 비상식적인 근로조건은 아니었기에,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했지만. 남편은 '내 친구들이 직접 겪은 일이고, 한 두 명이 아니라 수십 명이 겪고 있는 일.'이라고 맞섰다.


본인이 한국으로 건너가면 엄청난 임금 삭감과 삶의 질을 반납해야 하지만, 내가 법 공부를 열심히 해서 미국에서 자리 잡으면 우리 모두가 윈윈이 아니냐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문제는 내가 미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 아주 많이 요원해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풀브라이트 귀국조건 때문에 웬만한 기업에서 채용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 변호사들에 비해 내가 법률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리가 전무했다. 유명 저널에 출판한 논문도 없었고 써낼 자신도 없었다. 미국 사람들끼리 하는 네트워킹이라는 건, 더더욱 내키지 않았다. 한국에서의 8년 공무원 경력은 흥미를 끌기는 했지만, 내 능력을 입증할 자료는 되지 못했다.



한국의 회식문화가 그리웠다. 선배들, 후배들, 동료들. 안전한 밤 거리. 수많은 노점상. 배달음식과 분식. 주말마다 하던 독서모임. 작은 책방들. 망원동. 한남동. 서래마을.....



여가 없는 직장인의 삶이 버거워서 도망치듯 유학을 온 나이건만, 하루 18시간을 빡빡하게 채워서 살던 한국의 삶을 오랫 동안 그리워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병원. 총이나 강도 걱정 없이 쏘다닐 수 있는 자유. 전국 어디에나 널려 있는 맛집.


그 무엇보다 한국 사회에선 위기에 처했을 때 지원군을 부를 수 있다는 것. 친구든, 선배든, 엄마든, 119든. 자유롭게 언어를 구사하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한국이 매력적인 이유가 차고 넘쳤다.



그렇게 우리는 누가누가 싫어하냐의 경쟁을 꽤 오랜 시간 이어갔다. 사실은 지금도 어느 정도 진행 중이다. 남편은 미국에 비이성적일 만큼 애착을 지니고 있고, 나는 비이성적일 만큼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 즉 '영속적 갈등'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이 주제가 나오면 둘 다 예민해지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다.


그렇게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한국과 미국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미국 대기업을 퇴사하고 스타트업에 온전히 몸담아 '이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투잡에 매진했다. 나는 대학원생활을 고시생처럼 하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으며 글을 읽고 글을 썼다. 억지로 사람을 만나고 아쉬운 소리를 하며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많이 있었다.







근데 이 와중에 아기라니.....


아내를 닮은 딸이 보고 싶다는 남편의 순수한 소망이 그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주거지' 문제와 함께 '아이' 문제도 '영속적 갈등'의 카테고리로 넣었다. 남편이 아이를 꿈꾸게 된 이상, 꿈꾸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가 너무 버거웠다. 게다가 아기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한국에 살아도 괜찮다" "아이 없이 살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철썩 같이 믿고 결혼한 나로서는 "미국에서 자리 잡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해봐라." "아이를 낳고 싶다."는 남편에게 배신감 마저 느꼈다. 남편이 고통 받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았기에, 왜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두 가지 결론 모두 내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너무나 많았다.





행정고시 합격을 하고 얼마나 기뻤던가.

죽도록 일을 하고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을 때 얼마나 뿌듯했던가.

미국 온 지 4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술 마시고 내게 전화해 '잘 지내지~~ 꼭 돌아와야 돼"라고 말해주는 착한 동료들.


하이힐을 신고 또각거리며 무거운 가방을 들고, 국회와 세종시를 누비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내 모습. 의원회관과 기획재정부에 친구를 많이 만들어두어서 힘든 일도 즐겁게 처리할 수 있었던 나.



머나먼 미국 땅에서 바닥에서부터 시작하는 대학원생이 되어, 나보다 어린 변호사들이 나를 경력 없는 20대 취급하는 곳에서, 이미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차라리 로스쿨이 아니었다면 좀 나았을지도 모른다. 로스쿨 박사과정이라는 애매한 신분 때문에 나는 변호사들로부터도 학자들로부터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아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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