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이야기 : 소설 2분 남짓]
길 위엔 어제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뽀드닥 거리며 눈 위로 걷는 걸음은 불안하면서도 새삼 ‘양지바른 쪽 인도 위 눈은 햇살과 어우러져 이렇게 눈부시도록 하얄 수 있구나’ 하며 반짝이는 곳으로 눈길이 갔다.
엄마가 쓰실 기저귀, 내복, 조끼와 딸기두팩이 꽤 무거웠다. 밤사이 잘 못 주무시더라는 요양원 전화를 받고 엄마에게 할머니는 대단한 존재구나라는 생각만 들었다.
엄마는 딸만 다섯을 낳으셨다. 하필 집집마다 아들이 하나, 둘씩 있다 보니 셋째부터는 눈치가 보였다고 하셨었다. 그중에 가장 엄마를 울컥하게 한 아이가 바로 나, 넷째였다.
할머니는 살림살이 크진 않아도 할아버지 공경하는 마음이 크시고, 자식교육도 신경 쓰셨다. 아들 셋을 거의 연년생으로 낳으시고도 부지런함으로 집안은 늘 반들반들하게 유지하고 남에게 책 잡힐 일은 아예 시작도 안 하시던 분이셨다. 언니들에게는 몰라도 나와 막내에게 옛날 호랑이이야기, 동네 옛날 일 뿐 아니라 조선시대이야기까지도 재미나게 잘해주셨다.
할머니에게 엄마는 정성을 다했다. 할머니도 이렇다 하게 아들 없어 어쩌느냐는 가슴에 못 박힐 말씀도 하신 적이 없었다. 막내가 태어난 후 할머니의 강요로 모두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마 아빠가 큰아들이어서였을 거다.
어제가 할머니 기일이었다. 돌아가신 지도 스무 해가 다 되니 추도예배도 각자 집에서 하는 걸로 바뀌었다.
엄마는 맑지 않은 정신에도 할머니를 떠올리신 거다.
내가 가면 놀라지 않으실지 모르겠다.
엄마는 “널 낳고 얼굴 보고 깜짝 놀랐다, 네 할머니를 내가 낳은 줄 알았다니까!” 하시며 할머니를 닮은 나를 보며 자주 말해주셨다. 정신이 흐린 상태면 날 할머니로 아시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김숙자 님 면회 왔습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인터폰으로 답을 하자 문이 열렸다. 사무실에 기저귀와 딸기를 전하고 엄마방으로 올라갔다.
“엄마!”
“어, 왔니? 밖은 춥지 않고?”
“추워요. 엄마 조끼 입어봐요. ...어때? 따뜻해? 하하, 나 알아봐 줘서 좋다. “
“아무렴 내가 널 왜 못 알아봐. 내가 말했지? 너 태어난 날?”
“그럼, 수 백번 들었지. 또 해줘요.”
“배가 묵직하고 밑으로 쳐져있어서 아들인 줄 알았어. 배모양이 나오면서 먹고 싶은 걸 말하면, 네 아빠가 어떻게든 구해오려고 하고. 그러면 네 할머니는 아빠한테 낳아봐야 아는 거라며 기대하지 못하게 하셨어. 점심 먹고 나서부터 진통이 오니 할머니는 물 끓이고 너 받을 준비를 차근차근 다 하셨지. 너 세상에 내놓을 때, 힘도 안 들고 힘내서 낳았어. 할머니가 반갑게 웃으시며 아들이라시더라. 좋아서인지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잠이 들었어. 얼마나 잤나 방은 어둡고 옆에 아빠는 자고 있고, 할머니도 너를 사이에 두고 누워계신 거야. 아들이라니 좋기도하고 궁금해서 기저귀 걷고 봤는데, 내 눈이 잘못 됐나? 내가 뭐에 홀렸나? 잠 속인가? 정신이 없는데 할머니가 일어나시며 조용히 내 손 잡으시더라. “
“할머니가 뭐라하셨댔지? “
“... 흠, ...딸 낳았다고 하면 몸 풀자마자 울텐데 그건 못 보시겠더라고... 그래서 안 나오는 거짓말을 했다고... 괜찮다고... 어머니, 우리 어머니 내가 참말로 존경했어요. 이 세상에서 날 제일로 사랑해 주셨어요... 제가 어머니 만나면 예서 있던 일 재미나게 말씀드릴게요... “
엄마는 한참을 흐느끼고 감사하다며 소중한 기억을 말로 풀어내셨다. 그러다 잠시 말을 멈추시더니...
“ 어머니! 왜 여기 계세요? 아범이 어머니 모시고 작은댁 다녀온다고 가셨잖아요?”
“엄마, 나예요. 명희야. 할머니랑 똑 닮은 넷째, 명희. 엄마,사랑해요. 사랑해...”
나도 할머니처럼 엄마 손을 잡았다.
엄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좋아하는 할머니를 만나셨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