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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루나 Mar 23. 2024

더 진한 삶을 향해 두려움 없이 걷는 중입니다.

해가 지는 지역이라는 뜻의 마그레브,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나라 모로코의 도로를 달릴 때 해가 지고 있었다. 밝았던 하늘은 진한 노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선한 사람들이 함께 달리던 버스에는 하루 내 부산히 달려온 탓에 노곤한 공기가 노을처럼 깔려 앉아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그레브의 낯설고도 아름다운 풍경 덕에 결코 노곤하지 않은 마음으로 버티 히긴스의 <카사블랑카>를 함께 들었다. 오른쪽 창으로 고개를 돌려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그 순간이 과거인양 그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잠시 머물 뿐인 이 젊음과 건강이 더 이상 내 곁에 없을 삶의 어느 무렵에 다다랐을 때 나는, 아직 젊은 내가 많이 웃고 행복했던 이 여행과 이 노을이 몹시 그리울 것만 같았다.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모로코까지 가는 팀을 배정받았을 때 내심 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그러나 늘 내가 맡고 싶은 팀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여행자로서 여행할 때는 변수가 생겨도, 일정이 꼬여도 '아무렴 좋아' 하는 마음으로 여행하지만, 내가 가이드로서 진행할 때는 전혀 다르다. 특히 모로코는 페리를 타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야 하는 일정이 있기에 큰 변수가 도사리는 일정이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저 해협은 수시로 배가 취소되거나 심하게 흔들린다. 그중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달이 3월이다. 게다가 우리 팀이 모로코에 들어가기 불과 며칠 전 '라마단'이 시작되었다. 이슬람 국가인 모로코에서는 라마단이 되면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물도, 음식도 먹지 않고 담배를 피우는 것도 금지된다. 차라리 이렇게 큰 변수를 맞닥뜨리니 이건 큰 걱정도 안 했다. 내가 걱정한다고 바뀔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


그보다 더 큰 걱정은 이 팀의 전적이었다. 비슷한 일정으로 작년 가을 모객을 해서 왔는데, 모로코에서 먹은 음식이 잘못되었는지 서른 명이 넘는 손님 대부분이 장염에 걸려 크게 고생하고 이후에도 여러 복잡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회사의 걱정과 신신당부하는 이야기를 사전에 여러 차례 들은 터라 '왜 이런 팀을 내가 맡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신 좋은 점도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한 팀이 아니라 미국 교민들이 오는 팀이었고, 덕분에 일정이 한국 패키지보다는 여유롭고 또 비록 다른 외국이지만 그래도 같은 교민이라는 정서적 교감이 팀을 만나기 전부터 생겼다.


첫 공항 미팅부터 좋았다. 시니어가 팀의 과반수 이상이었으니 젊은 내가 보기 좋으셨나 보다. "예쁜 분이 나왔네요."라는 첫인사에 나는 이 팀을 잘 진행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을 했다. "젊은 사람 보니 귀엽고 좋다."라는 큰 어머니 뻘 되시는 손님의 말이 따뜻했다. 전 팀의 비슷한 연배의 분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며 "너는 나 같은 부모가 없어?"라고 소리쳤었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싶게 모든 게 좋았다. 날씨마저 우리 편이었다. 한 도시에 도착할 때면 그 도시에 딱 그날만 날씨가 좋았다가 떠날 때는 다시 흐려졌다. 다만 나는 지난 팀의 상처가 너무 커서 마음이 채 아물지 않은 상태였다. 저녁이 호텔식이라 와인 한두 잔과 함께 좀 여유롭게 식사를 할 때면 업계 배터랑이었던 인솔자에게 현재 진행 중인 팀이야기보다 지난 팀의 상처를 더 많이 하소연한 것 같다. 큰 오빠처럼 묵묵히 들어주고 위로해 주던 인솔자를 만난 것도 또 나의 복이었다.


각자 미국의 다른 주에 살고 있는 손님들이라, 3개 비행기로 나뉘어 팀이 마드리드에 들어오는 탓에 다른 터미널로 도착한 손님들과 연락하기 위해 엉겁결에 나까지 손님들 단톡에 들어가 버린지라 매일 일정 후 인솔자가 올려주는 그날의 여행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라나다 야간 투어를 마치고 호텔 방에서 사진들을 볼 때는 사진들 속에서 환하게 웃는 모두의 모습이 또 이상하게 그리워져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아름다웠던 알함브라 (c)BGH


10일 출장이 참 길 것만 같았는데 금방 헤어짐의 시간이 다가왔다. 헤어짐 이틀 전쯤 한창 달리던 버스에서 인솔자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며 유익종의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를 알려주었다. 그날 밤부터 나는 매일 그 노래를 계속 들었다. 포르투갈과 모로코를 돌아 다시 첫날 서로를 만났던 마드리드로 돌아오던 아침은 정말 밝고 맑았다. 나는 그 밝은 곳에서 헤어짐을 준비해야 했다.


다시 볼 수 없는 지금의 우리 모습들이여
다들 그런 것처럼 헤어짐은 우리를 기다리네
- 유익종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가사 중


팀을 마치고 사무실에서 고생이 많았다고 하길래, 되려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고 답했다. 정말 그랬다. 아마 모든 여행가이드들이 이런 팀을 한 번은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손님, 함께 일하는 동료인 기사와 인솔자, 날씨, 일정, 진행까지 모두 다 좋은 팀. 정말 진심으로 웃고 행복한 팀. 너무 큰 상처 직후 만난 팀이라 걱정도 많았지만 나의 지난 상처와 앞으로 또 마주칠 상처까지 치유해 주는 팀이었다. 앞으로 또 힘들 때가 오겠지만 아마 오래도록 이 팀의 기억으로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올 한 해 더 진한 삶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가겠다. 작은 사무실 모니터 앞에서 저무는 삶이 아닌 때론 대서양 끝에 서서 지는 해를 보는 속으로. 수많은 사람과 만남, 헤어짐 속에서 울고 상처받아도 치유받고 치유하며 웃고 사랑하는 그 삶 속으로. 그리하여 젊은 나를 더 많이 기억할 수 있는 그런 삶 속으로. 그렇게 걷다 보면 또 이처럼 선물 같은 만남과 마주하지 않을까.


세상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우리 헤어짐을 노래하게 하소서.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남을 노래하게 하소서.
우리 다시 만남을 노래하게 하소서.
- 유익종 <세상 가장 밝은 곳에서 가장 빛나는 목소리로> 가사 중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바라본 대서양의 노을 (c)BGH



너무 오랜만에 쓰는 글이네요. 저는 올해 여행가이드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오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후 꽤 즐겁게 몸 담았었던 이 직업은 코로나라는 변수를 맞았었고, 전 회사라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었지요. 그러다 올해 다시 다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로 돌아와 벌써 많은 일을 했고 하는 중입니다. 전 사실(?) 무슨 일이든 꽤 열심히 하거든요. 이 또한 일이니까 열심히 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이렇게 선물 같은 팀을 만나서 약간은 이 일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더 많은 이런 만남을 기대해 봅니다. 다들 따뜻한 봄날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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