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립 짐바르도 : 루시퍼 효과

by 정지영

익명성 실험

1971년, 필립 짐바르도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스탠퍼드 감옥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행동이 특정 상황과 역할에 의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목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24명의 평범한 남학생이 무작위로 간수와 죄수 역할을 맡았고, 실험이 시작되자마자 죄수들은 수감번호로 불리며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들은 동일한 죄수복을 입고 발목에 쇠사슬을 차며, 선글라스 형태의 거울안경을 착용하여 익명성이 철저히 보장되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은 개인적 정체성을 지우고 오직 역할에 몰입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 역시 제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신원을 감추고 특정 역할에 몰입하도록 유도되었습니다.


실험은 지하 감옥처럼 개조된 스탠퍼드 대학의 실험실에서 이루어졌으며, 참가자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자신들에게 부여된 역할만을 수행했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참가자들은 점차 그들의 역할에 깊이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익명성이 보장된 상태에서 점점 더 과격하고 가혹한 행동을 보였고, 반면 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은 점차 무기력해지고 순응하게 되었습니다. 실험은 원래 2주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윤리적 문제로 인해 6일 만에 중단되었습니다. 이 실험은 익명성이 보장된 상황에서 사람들의 행동이 그들이 처한 상황과 역할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익명화된 상태에서는 평소의 도덕적 기준과는 다른 행동을 하기 쉬워진다는 점이 드러났습니다.



도덕적 정체성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익명성과 역할이 결합될 때 도덕적 정체성이 얼마나 쉽게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인터넷 댓글란에서 익명으로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상냥한 사람이지만, 얼굴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스탠퍼드 실험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평소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들도 익명성을 보장받고 특정 역할에 몰입하면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교통체증 속에서 화를 내거나, 온라인에서 공격적인 댓글을 달 때의 상황과도 유사합니다. 이로 인해 도덕적 행동이 진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깁니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진정한 도덕적 행동은 타인의 시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세운 도덕적 기준을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익명성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자신의 도덕적 판단에서 쉽게 멀어지고, 순간적인 욕망이나 감정에 이끌리기 쉽습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집단 속에서 큰 소리를 내거나, 상황에 따라 우리의 도덕적 기준을 일시적으로 무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실험은 결국 '익명성 속에서 나타나는 행동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도덕적 정체성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만듭니다.



루시퍼 효과와 도덕적 상황주의

짐바르도는 이 실험을 통해 '루시퍼 효과'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평범한 사람도 특정 상황과 익명성 속에서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회사에서 상사에게 지시를 받아 불편한 결정을 내리거나, 축구 경기장에서 우리 팀을 응원하면서 상대 팀을 과도하게 비난할 때와 같은 상황을 떠올려 보세요. 평소에는 도덕적이고 착하게 행동하던 사람도, 익명성과 상황적 요인이 주어지면 쉽게 악행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이 단순히 고정된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도덕적 상황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이 특정 상황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실험에서 간수 역할을 맡은 학생들이 점점 더 가혹한 행동을 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상황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도덕적 행동을 하는 이유가 단지 고정된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결국, 인간의 도덕성은 성격뿐만 아니라 상황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도덕적 기준을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며, 도덕적 판단의 유동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합니다.



탈개인화

스탠퍼드 감옥 실험에서 참가자들은 수감번호, 제복, 선글라스 등을 통해 개별적인 특징을 완전히 상실하고 특정 역할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탈개인화'라고 불리는 현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개인적 정체성을 잃고 특정 집단의 일원으로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어, 축구 경기장에서 팬들이 유니폼을 입고 열정적으로 응원할 때, 그들은 개별적인 자신이 아닌 팀의 일원으로 느끼게 됩니다. 탈개인화 상태에서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도덕적 판단이 약해지며, 개인의 주체성보다는 집단이 요구하는 행동을 따르기 쉬워집니다. 일상에서도 이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형 할인 매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물건을 쟁탈할 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법한 무리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사람이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도 여전히 집단의 규범에 휩쓸려 주체적 자아를 잃기 쉽다고 지적했습니다. 스탠퍼드 실험에서도 간수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점점 더 가혹해지고, 죄수 역할을 맡은 참가자들이 무기력해지는 모습이 관찰되었습니다. 이는 익명성과 집단 속에서 개인의 자아와 도덕적 책임감이 쉽게 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주체적 도덕성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시켜줍니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의 도덕적 기준을 지키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합니다.



도덕적 책임과 주체성

이 실험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도덕성이 개인의 내면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상황에 의해 쉽게 변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덕적 정체성은 익명성과 역할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을 수 있으며, 탈개인화된 상황에서는 집단의 규범에 쉽게 휩쓸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도덕적 기준을 스스로 세우며 이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도덕적 판단은 단순히 주어진 역할이나 상황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진정한 주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우리의 도덕적 책임감을 강화하고, 사회 속에서 진정한 자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keyword
정지영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교사 프로필
구독자 311
이전 12화라이프니츠 : 시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