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재자들의 주인이 아니라, 존재의 목자입니다."(The human being is not the lord of beings, but the shepherd of Being.)(하이데거, [휴머니즘에 관한 편지] 중에서)
스마트폰 알림이 끊임없이 울리고, 메시지가 쏟아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쉴 틈 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지하철에서도, 잠들기 직전까지도 업무 메일을 확인하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애씁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올바른 걸까요?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깊은 물음을 던집니다.
하이데거는 현대 기술문명의 본질을 '게슈텔'(Gestell)이라 부르며, 이것이 세상의 모든 것을 쓸모와 효율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게 만든다고 지적합니다. 울창한 숲 앞에서도 우리는 더 이상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한 채, 얼마나 많은 목재를 얻을 수 있을지만 계산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신, 개발 가능한 면적을 따지죠. 맑은 강물도 전기를 생산하는 자원으로만 여깁니다. 심지어 사람과의 관계마저 '인맥 관리'라는 이름으로 도구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하이데거는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합니다. 음악을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가 듣는 소리는 '존재자'이지만, 그 음악이 우리의 마음을 울리게 하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감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 앞에 있는 책상이나 커피잔은 '존재자'이고, 이것들을 있게 하는 근원적인 바탕이 '존재'인 셈이죠. 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공기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이런 '존재'를 잊은 채 살아갑니다. 아침 출근길에 마주치는 꽃들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배경일 뿐이고, 동료와의 대화도 단순한 정보 교환에 그칩니다. 하이데거는 이를 '존재 망각'이라 부르며 현대 문명의 깊은 위기로 봅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존재의 목자'가 되라고 제안합니다. 목자는 양들을 지배하지 않고 그저 지키고 돌볼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세상을 통제하려 들기보다는, 모든 것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피어나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매일 저녁, 하루를 마무리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오늘 나는 무엇을 지배하려 했나요? 그리고 무엇을 돌보았나?"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였나요, 아니면 그저 지나쳤나?"
존재의 목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습니다. 늘 성과를 요구받는 삶 속에서, 잠시 멈추어 존재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많은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자연과 타인, 그리고 우리 자신과 다시 깊이 만나는 길이죠.
당신은 오늘, 어떤 존재의 목자가 되어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