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진정으로 상투적 표현이 아닌 단 하나의 문장도 말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아이히만은 다소 나쁜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중요한 사건이나 일을 언급할 때마다 동일한 상투적 문구와 스스로 만들어낸 클리셰를 한 단어도 틀리지 않고 반복했습니다."([H]e was genuinely incapable of uttering a single sentence that was not a cliché.[…] Eichmann, despite his rather bad memory, repeated word for word the same stock phrases and self-invented clichés each time he referred to an incident or event of importance to him.)(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언어를 분석하며, 상투적 표현에 의존하는 비사유(thoughtlessness)가 어떻게 윤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지 날카롭게 지적했습니다. 여기서 상투적 표현이란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이다'와 같은 표현을 말합니다. 이런 언어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게 만들어, 윤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의 사례는 단순한 언어 습관이 얼마나 심각한 윤리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는지 경고합니다.
이러한 통찰은 현대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의 일상적 언어는 단순한 소통 수단을 넘어 사회구조와 권력 관계, 윤리적 책임의 문제와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언어게임'을 통해 보여준 것처럼, 언어는 사회적 실천의 형태로 작동하며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규정합니다. 여기서 '언어게임'이란 언어가 특정 맥락과 규칙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가 형성된다는 개념입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상투적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시간이 약이다"라는 익숙한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표현은 농경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상처가 아물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복잡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리게 만드는 소극적 태도를 조장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직장에서의 부당한 대우나 관계의 갈등과 같은 문제에서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은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게 하거나 적극적인 해결을 미루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이에게 건네는 이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현실의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고 개인의 고통을 방관하게 만드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표현은 더욱 복잡한 권력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이 표현은 조직 내에서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명분으로 개인의 비판적 목소리를 억누르거나, 구성원들이 기존 권력 구조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역 이기주의나 디지털 시대의 '집단 사고', 학연 중심주의 역시 이런 상투어에 기반한 현실인지 모릅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표현도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적 자기계발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세대 간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청년 세대가 직면한 구조적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환원시킬 수도 있습니다.
상투적 표현은 세상을 바라보는 특정 관점이나 왜곡된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투적 표현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어에 대한 비판적 의식의 함양이라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교육 현장에서는 비판적 리터러시를 강화하고, 조직에서는 수평적 의사 소통 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서는 알고리즘의 편향성을 이해하고 대안적 소통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렌트가 경고했듯이, 비사유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서서히 스며듭니다. 우리의 언어가 어떻게 사고를 제한하고, 현실을 왜곡하며, 책임을 회피하게 만드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언어 순화를 넘어 사회 전반의 윤리적 성숙을 위한 핵심 과제입니다.
진정한 소통과 윤리적 판단은 상투적 표현의 편안함을 거부하고, 매 순간 깊이 있는 사고를 시도할 때 가능해집니다. 여기서 '깊이 있는 사고'란 단순히 표면적인 정보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겨진 맥락과 의미를 탐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고려하며, 자신의 기존 생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열린 마음으로 새로운 시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언어적 성찰의 본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