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합니다. 어제까지 마음이 통하던 친구가 갑자기 어색해지고, 든든했던 가족이 문득 멀게 느껴지는 순간들. 직장에서도 동료와의 관계가 어느새 미묘하게 달라지곤 하지요. 왜 이런 변화가 생기는 걸까요? 사람이 변한 걸까요, 아니면 상황이 달라진 걸까요?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그 짐멜은 이 물음에 색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관계의 본질은 사람 자체가 아니라, 그들이 맺는 형식에 있다"는 것입니다. 관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구조와 패턴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인다는 거지요.
짐멜이 말하는 '형식'은 사람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과 패턴을 뜻하고, '내용'은 그 안에서 실제로 오가는 것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경쟁, 협력, 우정 같은 관계의 방식이 형식이라면, 그 속에서 오가는 감정, 정보, 도움 같은 것들이 내용이 되는 것이지요.
학교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라는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 틀이 형식이라면, 수업 시간에 주고받는 지식이나 질문, 평가는 내용이 되지요. 같은 형식 안에서도 실제로 오가는 내용은 학습에서 개인적인 고민 상담까지 다양하게 바뀔 수 있습니다.
짐멜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사회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흔히 사회를 개인들의 단순한 모임이라고 생각하지만, 짐멜은 다르게 봅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사회의 모습은 사람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그 관계의 흐름 속에 있습니다. 이는 마치 축구 경기와도 같습니다. 누가 뛰느냐보다는 선수들이 만들어내는 패스와 전략, 경쟁이라는 상호작용이 경기의 본질이지요. 실제로 선수가 바뀌어도 '경기'라는 형식만 유지되면 축구는 계속됩니다.
형식은 내용이 흐르는 길을 만들고, 내용은 다시 형식을 바꾸기도 합니다. 친구 관계를 예로 들어볼까요? 서로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도 갈등이 쌓이면 우정이라는 형식이 흔들립니다. 반대로 단순히 공부만 하던 스터디 모임이 진정한 친구 관계로 발전하기도 하지요.
이런 관점으로 일상을 바라보면, 갈등이나 멀어진 관계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만 문제 삼을 게 아니라, 어떤 관계의 틀 속에서 그런 반응이 나왔는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지요. 가족이나 친구, 직장 동료와의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온 관계의 모습이 달라진 것인지 곰곰이 따져볼 수 있습니다.
이는 더 큰 사회 문제에도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위계질서가 강했던 조직이 수평적인 팀 체제로 바뀌면, 구성원들 사이에 오가는 아이디어와 의사결정의 방식도 크게 달라집니다. 시민 단체에서도 리더십이나 소통 방식을 조금만 바꾸어도, 참여하는 사람들의 활동이 훨씬 더 활발해지곤 하지요. 노사 갈등이나 지역 간 다툼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주장만 따질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 구조나 대화의 장이 얼마나 공정하고 열려 있는지부터 살펴야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정부나 지자체가 시민의 목소리를 더 듣기 위해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거나 온라인 플랫폼을 활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의사결정의 틀을 새롭게 디자인함으로써 더 다양하고 투명한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전통적인 거리 집회가 온라인과 SNS를 통한 디지털 캠페인으로 진화한 것도 좋은 예입니다. 형식이 바뀌니 새로운 내용과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짐멜은 우리가 흔히 쓰는 '개인'과 '사회'라는 구분에서 벗어나, 그 둘을 이어주는 관계의 형식에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사회의 실체는 눈에 보이는 개별 요소가 아니라, 그것들을 서로 엮어주는 보이지 않는 패턴 속에 있다는 것이지요.
"사회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흐르고 변하는 관계의 형식"라는 짐멜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형식이 바뀌면 내용도 달라지고, 내용이 쌓이다 보면 형식도 새롭게 변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이해한다면, 개인적인 갈등이든 사회적 문제든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 속에서 어떤 형식을 지키고 만들어갈지, 그리고 그 안에서 오가는 것들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끊임없이 살피는 자세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짐멜이 우리에게 전하는 깊은 지혜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