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信言不美,美言不信)(노자, <도덕경> 중에서)
우리는 듣기 좋은 말에 쉽게 끌립니다. 멋진 광고 카피, 가슴을 뛰게 하는 정치인의 연설, 책에서 읽은 근사한 문장을 접하면 그 말을 쉽게 믿어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이 과연 진실할까요? 노자는 『도덕경』에서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진실하지 않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상식에 반하는 이 말이 전하는 언어의 본질과 삶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信(신)’은 단순한 신뢰나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자에게 있어 ‘信’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 갖는 진실성"을 뜻합니다. 그는 인위적인 조작 없이 자연스럽고 꾸밈없는 것이 참되고 진실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信言', 즉 진실한 말이란 무엇일까요? 노자는 진실한 말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담은 말이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기준으로 세상을 평가하려 합니다. 따라서 자연이 자신이 만든 기준에 맞지 않으면 불편하고 거칠며, 부족하다고 느낍니다.
진실한 말은 듣는 사람의 기준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듣기 싫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해서 듣기 좋게 꾸며서는 안 됩니다. 듣기 좋게 다듬어진 말은 종종 진실에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건강이 악화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환자의 건강을 위한 진실한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친구에게 "네가 틀렸어. 다시 생각해봐"라고 말하면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할 수 있지만, 결국 더 깊은 우정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사실 노자는 언어 자체에 대해 회의적이었습니다. 『도덕경』의 첫 구절에서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도를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언어가 궁극적인 본질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정의하는 다양한 말들이 존재하지만, 그 어떤 말도 사랑을 온전히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사랑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 더 깊은 이해를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자는 언어보다 경험과 깨달음을 중시했습니다.
‘美(미)’는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노자는 이를 인위적인 조작과 연결 지었습니다. 듣기 좋게 꾸며진 말은 진실에서 멀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그는 사람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꾸며진 언어가 본질을 흐릴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광고에서 “이 화장품 하나로 당신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지만, 과장된 표현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름다운 말이 항상 진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자는 듣기 좋은 말보다 진실한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진실한 말을 들을 때는 감정적으로 거부하기보다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반대로, 진실한 말을 할 때는 꾸미지 않고 사실을 그대로 전달해야 합니다. 친구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려 할 때, "이건 틀렸어"라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불편할 수 있지만, 애매하게 돌려 말하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한 말이 거칠게 들릴지라도, 그것이 꼭 필요한 조언이라면 피하지 말고 전해야 합니다. 진실한 말은 결국 신뢰를 쌓고 더 깊은 이해를 이끌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