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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Mar 09. 2023

9. 약밥과 (단)팥죽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얼마 전 할머니가 핸드폰을 잃어버리셨다. 잃어버릴 곳은 노인정뿐인데 예전엔 수첩에 빼곡하게 적혀있던 노인정 할머니들 번호도 이제 모두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다며 종종걸음으로 정신없이 집안을 돌아다니셨다. "할머니 핸드폰은 알뜰폰이라 실수로 가져갔으면 몰라도 아무도 훔쳐갈 일은 없으니 걱정 마세요.."라고 할머니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귀에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도 이젠 어쩔 수 없이 스마트폰 없인 불안한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이런 일에서 우리 집은 기가 막힌 협동심을 보인다. 엄마, 아빠 핸드폰으로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결과는 묵묵 부답. 할머니는 홍**할머니가 분명하다며 확신하는 순간이었다. CSI인 것 마냥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해 놓은 방법이 있다고 할머니 구글계정으로 로그인을 해 핸드폰 위치를 찾아내겠다며 쪼그려 앉아 작은 노트북 화면으로 분주히 손가락을 움직이는 아빠. 찾았다고 외치는 순간 내 핸드폰으로 범인인 홍**할머니의 손자가 전화가 왔고 모든 공은 진작에 내일 안에는 찾겠지라는 생각에 방에 들어가 있던 나에게로 돌아왔다. 아쉬운 기색을 감출 수 없는 아빠의 표정, 알고 보니 할머니 잠금화면에 기억에도 없는 내가 내 번호와 이름을 남겨놓아 전화를 걸 수 있었던 것. 핸드폰 케이스가 빨간색이면 멀리 있을 때도 잘 찾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오산이었다. 노인정 할머니들의 핸드폰 케이스는 모두 빨간색 수첩형태 케이스였다. 당장 집 앞에 길 건너 사거리에서 만나자며 분주하게 사라진 할머니의 뒷모습과 함께 할머니 핸드폰 소동은 허무하게 마무리 됐다.


다음날 언제 그랬냐는 듯 콧노래를 부르며 마루에 앉아 밤과 대추를 까고 있는 할머니. 할머니가 밤을 까고 있다면 그건 내일쯤 약밥이 완성될 것이라는 신호다. 나는 할머니의 약밥 말곤 먹지 않는다. 거리에 나가 모두에게 한 번씩 먹어보라며 소문내고 싶지만 내가 먹을 양이 적어질 수 있으니 너무 유명해지는 건 싫다. 매일 밥을 떡같이 지어내시더니 그건 약밥을 만드는 연습을 하신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찹쌀밥을 만들고 내가 만든 다면 절대로 넣을 수 없는 양의 설탕이 들어간다. 밥 양 : 토핑의 양 - 1:1 비율의 혜자스러운 약밥. 대충 만든 듯하면서도 골고루 섞여 어느 하나 밍밍한 부분이 없는 완벽함이 좋다. 많아도 내가 다 먹을 테니 아무도 주지 말라고 예약을 걸어 놓았지만 역시나 냉장고 문을 열어봤을 땐 노인정에 가져다주고 남은 절반밖에 없다. 이거라도 사수한 것에 감사하며 먹어야지 암.


밤을 생각하면 세트로 떠오르는 팥죽, 공통점이라고 하기엔 맞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두 음식 모두 쉬이 식지 않는 깊숙한 따뜻함을 품고 있는 느낌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따뜻함의 코어힘이 좋다고 해야 할까) 동지가 되면 귀신이 정말 팥죽 때문에 도망가는진 모르겠지만 여전히 우리 집에선 팥죽 냄새가 퍼진다. 기호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 먼저 플레인 한 팥죽을 끓인 후 각자 취향에 맞게 설탕을 섞어 먹는다. 회를 초장 맛으로 먹듯이 나는 팥죽을 설탕 맛으로 먹는다. 팥빙수를 먹으며 팥은 달아야 한다라는 선입견이 자리 잡은 건지 본연의 맛을 내는 팥을 먹으면 같은 팥인데도 왠지 낯설게 느껴져 마음이 편치 않다. 손이 큰 할머니는 대야같이 깊이가 깊은 냄비에 팥을 넣고 푹 삶고, 또 끓이고 그 뜨거움을 견뎌 낼 수 있는 떡만이 살아남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팥죽은 막 끓여 따뜻하게 먹기도 하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푸딩처럼 떠먹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국물 같은 형태보단 "죽"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밀도감 있게 묵직한 형태가 기품 있어 보이는 듯하다. 예전엔 하얀 떡 안에 동전을 넣어 먹다가 동전이 나오면 행운을 얻는다고 얘기 나누곤 했는데 행운을 많이 얻고 싶은 욕심에 동전을 많이 넣고 어떻게 생긴 떡에 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썼던 추억이 생각난다. 결국 팥죽에 들어가 푹 삶아졌을 땐 알아보지 못했지만. 역시 행운이란 누구에게나 랜덤 하게 돌아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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