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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Feb 16. 2023

8. 디저트 - 식혜와 수정과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저도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느꼈던 할머니가 아빠랑 제가 싸울 땐 결국 아들편 들 때 무지하게 서운했어요. " 할머니는 자기는 엄마가 없어 시어머니가 너무 무서웠다고, 당시에도 못 사는 집안은 아니었는데 시집가니 꼼짝 못 하고 마음에 상처 가는 말을 들어야 했다고, 나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다는 건 알지만 꼭 밥 먹을 때 옆에 앉아 또 자신의 기구한 인생에 대해서 늘어놓는다. 네가 시집가서 버릇없이 굴어 시부모님께 욕먹을까 걱정된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그날따라 듣고 싶지 않아 그만 동문서답을 해버렸다. 시집갈 나이가 되니 나는 나대로 불안한 마음에 아집은 더 세지는데 걱정되는 마음은 알지만 귀에 쌓여만 가는 의미 없는 잔소리를 듣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는 게 머리끝까지 느껴진다.  


할머니는 요즘 너무 오래 살아서 보고 싶지 않은 일을 보고 있어야 한다며, 죽고 싶어도 못 죽고 오래 사는 노인네들이 너무 많아.. 등등 한없이 비슷한 구절을 늘어놓는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마음이 불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여 질떄마다 죄책감이 스며든다. 정신지체가 있는 삼촌은 30년간 다니던 학교 세탁소 일을 그만두고 죽는 날까지 TV만 보다 자는 생활을 반복할지 모른다. 예전처럼 지하철에서 책을 강매 당해 오거나 매일 가는 떡볶이 집에서 계산은 잘 하고오는건지 걱정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밥을 먹으라고 다 해 놓고 불러도 자기가 나오기 싫을 때는 방에서 꿈적도 하지 않고 병원도 가지 않는 모습에 한숨이 절로나온다. 거기다 근래는 낮에는 계속 잠만 자고 밤에는 일어나서 티브이를 보는 바람에 할머니는 늘 선잠을 주무신다. 할머니 말대로 오래 살아서 보는 일이 맞다면 맞다.


설날과 추석, 그리고 특별한 날이 되면 할머니는 식혜를 만드신다. 고두밥을 하고 엿질금을 씻어내고 몇 번이나 반복해야 되는 작업을 할머니는 눈치채지 못할 사이 해 놓아 버린다. 할머니의 식혜는 알싸한 생각맛이 강하게 나는데 그것도 나름의 팬층이 있어 철마다 그 팬들의 성원에 맞춰 식혜를 만든다. 남들은 둥둥 뜬 쌀알이 좋다지만 나는 흐물 하고 애매하게 씹히는 느낌이나 그렇다고 달달한 식혯물만 먹고 남기기엔 남은 쌀알이 절반인 게 찝찝하다. 재료에 비해 가성비 없는 식혜가 십몇년이 지나도 정이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할머니의 전매특허는 '수정과' 라고 생각한다. 수정과 영업 담당은 아니지만 달달한 곶감과 어우러지는 계피향에 얼얼한 목 넘김은 절로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랄까. 동생은 식혜, 나는 수정과를 좋아하는데 수정과는 우리 집에서 나만 좋아한다는 이유로 식혜를 세 번 만들 때 수정과는 한번 정도 만든다.  사실을 밝히자면 이게 식혜를 먹지 않게 된 진짜 이유일 것이다.  


할머니의 머릿속에 더 이상 파낼 수 없을 정도로 뿌리 깊게 박혀 나오는 무의식적인 행동 속에 남아선호사상, 남성우월주의는 알아챌 때마다 신물이 나면서도 그런 할머니가 가엽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게 할머니가 살아온 방식이고 그 신념으로 점철된 것을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어렸을 때는 할머니의 사랑이 동생한테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면 그게 너무 샘이 났다. 그때는 어리광이라도 부릴 수라도 있고 그게 귀엽기라도 했지 이젠 어린아이도 아닌데 똑같이 계속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마음 밖을 스며 나올 때 정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다. 그런 마음을 숨기려 더 차갑고 가시 같은 말들만 뱉어낸다.


내일이면 없을 오늘 하루하루를 뱉어내고 후회하며 반복하며 살고 싶진 않지만 요즘은 오히려 어렸을 때가 더 지혜롭고 인내심이 많았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할머니가 문득문득 어렸을 때 나는 무지 예뻤다고, 그때 나를 키우는 재미로 살아갔다고, 지나가며 하는 말에 가슴이 콕콕 찔려온다. 지금의 나는 어딘가 꼬여있고 엉킨 매듭은 너무 오래되어 풀어도 풀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저런 이유로 식혜는 만들 때마다 거의 먹지 않곤 했는데 이번엔 갑자기 맛이 궁금해져 크게 한국자 떠서 먹어봤다. 나도 참 알 수 없는사람이다 싶었지만 역시 맛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마주 앉은 할머니한테 찌꺼기처럼 남는 쌀알이 아깝다고 했더니 웬걸 할머니는 그 쌀알이 맛있어 먹는거라고 먹고 싶지 않으면 남기라며 먹고있던 그릇을 가져가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왜 이걸 진작 몰랐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인가 싶었지만 이렇게나 오래 함께했는데도 여전히 새롭게 아는 것들이 생길 때 머리가 한순간 멍해지는 느낌이 든다.


주말에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라는 책에서 너무 부드러워 건축재료로는 잘 쓰이진 못하지만 또 그 특성 때문에 다른 딱딱한 나무들보다 추운 겨울을 잘 견뎌내는 너도밤나무에 대해 읽었다. 그냥 밤나무도 아니고 너도 밤나무라니, 이름이 웃겨 좀 더 찾아보게 됐는데 정확한 이유보단 유래만 한가득인 그 나무가 조금 더 귀엽게 느껴졌다. 또 한 번 참 이름은 짓기 나름이네 생각했다. 꼭 모든 게 맞아떨어져야 할 필요는 없잖아, 조금은 너른 마음으로 너도밤나무처럼 살아보자 생각하게 된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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