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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Feb 02. 2023

7. 특집 요리 - 곰국과 콩밥, 작은위로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멍- .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그래도 일상의 패턴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30살이 되고 나서 친구들 다 일하는 평일에 논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즐겁지만은 않은 일이다.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취준생 남자친구도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믿고 싶지 않지만 나 혼자 남게 된 지금 눈앞에 놓인 현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다. 꾸역꾸역 내 선에서 할 수 있는 일들로 하루를 메워나가려고 했지만 그럼에도 남아도는 시간들, 기약 없는 기다림에 텅 빈 것 같은 마음이 어딘가 답답해져 온다. 


깨워보려 했지만 내 힘으론 깨지지 않는 악몽처럼 '실패자'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맴돌아 어디론가 도망쳐버리고만 싶은데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고 알량한 자존심에 '나 사실 지금 백수야'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현실을 부정하고 있을 수만은 없겠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더 힘이 빠진다. 도망치듯 집에 있지 않으려고 밖을 돌아다녀보지만 추운 날씨에 저녁은 꼭 따뜻한 집에 돌아와서 먹는다. 


직장을 다닐 땐 이 집안을 내가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쭐한 마음이 막으려 해도 흘러넘쳤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바쁜 나에 비해 집에만 있는 사람들의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 한편으론 얄밉기도. 현재 나 포함 우리 집 인구의 60%가 백수다. 꽤 넓은 집이지만 4개의 방이 하루종일 만석이다. 시간을 때우려 어설프게 집안일을 하기엔 모집인원 1명의 주부 자리는 경력 60년의 할머니를 상대로 비비기엔 턱도 없다. 친구들이 바글한 SNS에 좋은 향기의 글만 올리는 것도 지겹고 더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브런치 글을 생각하는 건 더욱이 벅차다고 느껴져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싫었다. 무엇이 날 이렇게 무기력하게 만들었을까 언제까지 이 불투명한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을까 에라 모르겠다. 일단 밥이라도 먹자. 


할머니는 가다가 한 번씩, 아마 분기별 정도 곰국을 끓인다. 근래에 바꾼 가스레인지는 너무 뜨거워지면 자동으로 꺼져 조금 더 번거롭게 됐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 할머니 정신으로 곰국을 끓이는 날이면 집안 유리에 하얗게 습기가 껴있다. 송송 썰어놓은 파를 조금 얹고 하얗게 끓여진 곰국은 보기만 해도 몸에 온기가 도는 느낌이다. 집에서 가장 큰 냄비로 끓인 곰국은 먹을 양만 남겨놓고 여러 통에 나누어 냉동실에 얼려두는데 이후에 떡국이나 만둣국을 끓여 먹을 때 베이스로 쓰곤 한다. 그렇게  아침으로 어제 남은 할머니 표 거나하게 퍼진 떡국을 데워주시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떠올랐다. 다시 글을 써야겠다. 


할머니에게 사실 직장을 그만뒀다고 알리고 싶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잔잔했던 집안에 괜한 걱정을 일삼아 물결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집에 계속 있으면 할머니는 기억도 하지 않을 질문을 계속 물어볼게 빤히 그려져 피하곤 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추운 날 밖에 계속 돌아다닐 거냐며 할머니한테 실토해 버렸다. 할머니는 아빠가 단단히 주의를 주었는지 나에게 의외로 큰 말이 없었다. 한 달이 조금 지나가는 지금도 할머니는 내가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 준비는 잘하고 있는지, 다른 궁금한 게 있으면 잘도 물어보시면서 내 취업만은 한마디도 하지 않는 대신 몸에 좋다며 내가 싫어하는 콩밥을 내주는 것이 투박한 할머니의 위로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니 내일도 한번 더 힘을 내보자 생각해 본다.


이 글의 제목을 잡았을 때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어디로 갈지 모르는 변화의 흐름에도 담담히 걸어가자. 미래에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내가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이런 시절도 있었지 추억으로 되돌아볼 때까지, 힘닿는 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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