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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Mar 18. 2023

10.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거예요?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얼마 전에 노인대학에서 목포 여행을 다녀오신 할머니. 평생 전라도 쪽으론 여행 가본 적이 없으셔서 그런지 할머니께 목포는 매우 신선한 여행지였나 보다. 벌써 90살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리 편안한 관광버스라도 장장 편도 다섯 시간의 여행을 주파하셨다는 사실이 이리보고 저리 봐도 신기하다. 흔들 다리도 건너보고, 케이블카도 타고, 가는 식당마다 상도 큰데 반찬 수가 어찌나 많은지 상을 가득 매울 정도였다고 몇 번을 얘기하시는 할머니. 한편으론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시는데 내가 직접 그런 여행을 데려가 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못내 마음 한켠이 찔려오지만 여행 가실 때 용돈으로 오만 원 정도 쥐어 드리는 게 최선인, 나는 그런 살갑지 못한 손녀다. ‘다른 노인정 할머니들이 자기도 가고 싶다며 날리야’라는 말을 몇 번을 반복하시는 걸 보니 오래 앉아있지도 못하고 오래 걷지도 못하시는 노인정 할머니들의 부러움을 산 게 할머니는 퍽 맘에 드신 것 같다. 시간이 많은 대학생땐 돈이 없어 못 가고, 돈이 여유로운 직장인은 시간이 없어 못 가고, 시간과 돈 둘 다 성립되어도 받쳐줄 건강이나 체력이 없어 못 간다는 게 참으로 안타까운 인생의 섭리다.


어렸을 때 나는 삼시 세끼를 안 먹으면 죽는 건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실제로 한 끼라도 먹지 않으면 현기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할머니의 삼시세끼 가스라이팅 기법에 한 끼라도 거른다면 죽는다고 생각해서 자연스레 몸도 그렇게 반응한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살면서 본 것만 30년, 환갑을 맞이한 아빠가 살아온 세월로는 60년 이상을 할머니는 삼시세끼 차려 오셨다. 해외 유학을 다녀오며 10kg가 넘게 찐 나를 보면서 처음으로 '살 좀 빼야겠네'라고 하시면서도 저녁은 굶겠다는 나의 발언에 '밥은 살 안 쪄'라는 말로 나를 유혹하시던 할머니. 우리 집에선 일을 그만두게 되더라도, 피곤하다는 핑계로 12시간 잠을 자더라도 혼나지 않지만 밥을 거르면 바로 호랑이 고함이 나온다는 걸 뼛속부터 알고 있기에 '밥 먹으러 나오라'는 소리에는 한 명도 빠짐없이 기가 막히게 반응한다. 할머니에게 밥이란 그런 존재다.


할머니의 삼시세끼 논리는 사람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얘는 시골강아지가 아니라고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 된다고 몇 번을 알려드려도 너는 왜 이렇게 정이 없냐며 '개 세 끼(욕 아님 주의)'를 벗어나는 논리를 이해하는데 오래 걸리셨다. 피부병이 있어 사람 음식을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겨우 이해시킨 듯하였으나 사실 아직도 이해하지 않으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럴 확률이 높다. 나이가 들면서 고집만 세져 부엌, 마루 할 것 없이 이리저리 소변을 보는 오복이한테 '저놈에 고추를 잘라야겠다'며 서슴없는 성을 내시다가도 오복이가 웬일로 조용하나 싶어 부엌을 들여다보면 양념이 묻은고기를 물에 씻어 주고 있는 할머니와 언제 싸웠냐는 듯 공손하게 앉아 할머니가 주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오복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평화가 찾아온 마음에 미소가 지어진다. 


늘 대가족 속에서, 또  하숙집을 운영하시기도 하셨던 할머니는 한 번 반찬을 만들면 기본적으로 10인분은 만들어 놓으신다. 습관은 참 무섭게도 지금은 삼시세끼 모두 모여 밥을 먹지 않는데도 냉장고 문을 열면 미리 만들어 놓은 반찬들이 빈틈없이 메워져 있다. 안 먹은 지 오래돼서 썩어 버리는 양이 많아 제발 줄이시라고 얘길 해도 알겠다곤 대답을 하시지만 손이 기억하는 양은 세월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오랜 시간 동안 음식과 설거지를 해오시며 스쳐간 세월을 보여주는 듯한 깨진 손톱. 같은 음식이라도 가끔은 너무 짜기도, 너무 질어 수저로도 잘 떠지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마저도 할머니스러움이 묻어난 집밥이 나는 좋다. 할머니와 함께 먹어온 셀 수 없이 많은 집밥이지만 이제는 내가 오늘 한번 밥을 먹으면 인생 전체에서 먹을 집밥의 횟수가 줄어든다는걸 안다. 오늘도 한 숟갈, 한 숟갈 나이가 들어갈수록 짙어지는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지, 마음을 담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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