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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Apr 22. 2023

 11. 생선 구이? 아니면 고기?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예상 보다 오랜 쉼 끝에 취업을 했다. 새벽에 나가 엄마랑 함께 아침 운동을 하는 루틴을 짜는 바람에 할머니랑 마주하는 시간이 사실상 저녁 차려주실 때뿐인데 그마저도 할 얘기가 줄어들고 할머니는 우리의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게 느껴진다. 브런치에서 글을 쓰는 건 문장 근육을 기르는 것과 같다고 여러 번 알림을 주었지만 도저히 쓸 영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음의 근육 대신 몸의 근육이라도 길러보자고 노선을 틀었다. 는 건 핑계다.


근래에는 소위 ‘짬’이라고 불리는 사회생활 연차가 쌓이면서 뇌를 그다지 활용하지 않고도 입만 나불대는 스킬만 늘어간다. 녹화나 영상으로 남기지 않는 이상 휘발성이 강한 말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또 각자의 기억 속에 남을지 남지 않을지 알 수 없어서인지 왠지 모르게 말을 많이 하고 돌아가는 날은 마음이 공허하다. 그렇지만 글은 다르다. 글은 각자의 이해는 다를 수 있지만 서면으론 확실하게 남아있다. 증거가 있다 보니 나중에 이 글이었느니 저 말이었는지 각자의 이해를 논할 필요가 없다. 또 글을 쓸 때는 많은 생각이 필요하다. 어떻게 시작을 할지, 어떤 내용을 쓸지 주제는 무엇으로 할지 하나의 글감을 정한 이후에도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곱씹어 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글감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찰 때쯤 차분히 앉아 글을 써내려 가는데, 글을 완성하고 나서는 머리에서 글 속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서인지 머릿속이 개운하게 가벼워진 느낌이 좋아 매번 글을 쓰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이 들면서도 기억이 미화될 때쯤 글을 써볼까 다짐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PT체험을 받으면서 트레이너 선생님께서 “상처 난 근육이 회복되면 더 강해지기 때문에 좀 더 무게를 올리셔서 들으셔야 해요”라는 말을 하셨다. 마음에 상처가 난 날도, 나지 않은 날도 매일같이 일기를 써온지도 3년이 되어간다. 늘 했던 일을 글감으로 간단히 적어 내리는 것인데도 막상 실행에 옮기는 것이 쉽진 않다. 그래도 마음에 난 상처에 연고를 발라나가는 마음으로 쓰다 보니 마음의 근육도 얼만치 단단해져서 인지 상처받는 날보다 상처받지 않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만큼 자극에 무뎌졌다는 것 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슬프지만.


이번엔 특별히 두 가지 상황이 다시 글을 쓰게 만들었는데 첫 번째는 지난번에 이어서 할머니의 폰 케이스 때문이다. 어느 날 할머니의 폰케이스를 다시 봤는데 보드마카로 새빨간 케이스 위로 보드 마카로 그린 체크무늬가 지저분하게 번져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노인정 할머니들이 모두 다 똑같은 새빨간 수첩형태의 폰케이스를 사용하고 있어 구별하기 위해서 표식을 해놓은 것이었는데 할머니의 깊은 생각을 헤아릴 리가 없는 나는 ‘할머니가 여기다가도 그림연습을 하시네’라고 혀를 툴툴 차며 빈정댔다. 요즘 애들 같으면 다르면 달랐지 겹치는 폰케이스를 갖는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할머니들의 세계가 신선하게 느껴졌지만 아직도 보드마카는 좀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나의 귀차니즘을 이겨낼 정도는 아니었는데 다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은 기록하고 싶은 할머니의 귀여운 구석 때문이었다. 몇 가지 할머니가 발음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영어발음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코코스(코스트코)’라는 발음이 유독 귀엽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코코스는 천국과도 같은 곳이면서도 상상할 수 없는 곳인데, 보통 코코스는 집에서 거리가 있어 엄마아빠가 장을 봐 오곤 한다. 코코스에서 사 오는 품목은 정해져 있는데, 뭐를 사 오던 큰 덩어리로 사 오는 형태가 아무래도 이마트 트레이더스도 가보지 못한 할머니한테는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는 것 같다. 빵도 그렇고 늘 할머니가 얘기한 양의 2배를 사 올 때마다 매번 반가워하시는 것을 보면 할머니는 아마도 같은 가격에 서비스로 2배를 주시는 줄 알고 있으신 모양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선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할머니.


나는 어렸을 적부터 생선구이를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해산물류, 그중에서도 회를 좋아하는 거지만. 소화가 잘 되지 않는 고기보단 생선을 먹는 편이 뱃속도 마음도 편하다. 그럼 적당량의 고기를 먹는 게 어떠냐고 제안할 수도 있겠지만 나로 말하자면 밥을 못 먹고 산 것도 아닌데 어렸을 적부터 음식 욕심이 많아 누가 내 음식을 뺏어 먹는 것도 극도로 (지금도) 싫어하고 배가 불러도 맛있다면 배가 터질 때까지 먹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식구가 많은 우리 집에서 경쟁을 해서 쟁취하기보단 다른 가족들이 선호하지 않는 음식을 좋아하자라는 초식동물과도 같은 마인드로 살아왔다. 그 이외에도 이런저런 더 알면 다치는 복합적인 이유로 생선구이를 선호하게 됐는데 그렇다고 내가 고기의 맛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적은 양을 먹는다는 가정 하에 회식 메뉴를 고르라면 누가 뭐래도 생선보단 소화가 되지 않더라도 비싼 소고기가 좋다. 우리 집에선 생선구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없다 보니 어렸을 적엔 생선구이가 반찬으로 나오면 거의 내가 다 먹을 수 있는 게 좋았다. 할머니는 내가 무조건 고기보다 생선을 좋아한다고 뇌 뿌리 깊숙이 까지 인지 고리가 생성돼서 인지 내가 저녁을 밖에서 먹는 날에만 고기를 굽기도 하셨다. 한동안 2주가 넘게 저녁 반찬에 고기가 한 번도  없어 요즘엔 고기를 안 먹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내가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일부로 굽지 않으셨다는 말에 마음 써주신 건 감사하긴 한데 “할머니 저도 고기 먹고 싶어요…”. 또 집안 다른 사람들이 많이 먹지 않아 남은 생선구이를 내가 좋아한다고 며칠을 뼈만 남을 때까지 대펴주시기도 한다. 이제 점점 나이를 한두 살 먹어가면서 더 이상 음식의 양에만 집착하게 되지 않게 되었는데 녹초가 돼서 돌아온 날 할머니가 내가 며칠 안 먹어서 아무도 안 먹었다고 3일 전에 먹고 남은 고등어구이를 데워주시는데 마음이 복잡 미묘했다. 그래도 차려주시는 것에 감사해야지 초심을 되찾는 마음으로 아무 말 안 하고 다 해치웠다. 그래야 다음날 먹지 않을 수 있으니… 그러고 보니 오늘 반찬도 고기는 동생 앞에 놓이고 내 앞에는 어제 먹다 남은 생선조림이 놓였다. 아무래도 이번생에 나 혼자 먹을 때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서 고기는 어려울 것 같다. 고기를 먹고 싶으면 동생이나 아빠가 있을 때 숟가락 얹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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