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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May 21. 2023

12.  냉장고에 과일이 없잖아요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할머니는 나이가 들수록 고개를 숙이는 할미꽃 보단 햇빛이 있는 한 절대로 고개를 숙이지 않는 해바라기처럼 완고한 사람이다. 할머니랑 산다는 것은 분명한 장‘단’점이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 할머니는 해가 지날수록 자신의 노화를 교묘하게 활용할 줄 아는 능력의 소유자다. 가령 자신이 ‘대답하기 불리한 상황’에 놓였다거나 대답하지 않고 싶은 질문엔 ‘안 들리기’ 수법을 쓴다. 그럴 때는 정말 멀어서 안들리시는 건가 싶어 몇 번을 물어봤지만 이건 분명히 안 들리는 척하는 거다. 예전에는 매번 화를 내곤 했는데 누구나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 있는 것은 매한가지. 그러려니 하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다음으로 ‘기억 안 나기’ 수법을 소개하자면 할머니는 가끔 (사실은 자주) 새 옷을 샀는데 자신의 옷장은 아무리 봐도 더 이상 넣을 곳이 없고 그렇다고 환불할 생각은 더더욱 없을 터, 그럴 땐 기존에 잘 입지 않지만 버리긴 아까운 옷을 슬며시 내가 없을 때 내 옷장 구석 언저리쯤에 쑤셔 박아 놓는다거나 남아 보이는 옷걸이에 걸어놓는다. 한두 번 눈감아 주었는데 매년 구역을 침범하는 옷들은 늘어만 가고 줄어들진 않아 결국은 화를 내게 되면 할머니의 아전인수 막무가내는 더욱 거세진다. 잠시 걸어놔 줄 수 없느냐는 메아리만 되돌아올 때쯤 나는 반 포기 상태로 생각한다. ‘잠시‘가 아니잖아요..


저번 날에는 갑자기 내가 아끼던 에코백을 들고 오시더니 “이거 말고 다른 건 없냐”라고 태연하게 물어보신다. 잠깐만요 할머니 저는 이거 빌려드린 적도 없는데.. 물론 없어졌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미련한 주인지만.. 갑자기 또 화가 났다.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빠른 속도로 가방이 들어있는 서랍을 뒤지고 있는 할머니께 제발 물어보고 쓰면 안 되겠냐며 한바탕 하고 나서는 누그러진 마음에 한편으론 너무 화를 냈나 싶어 마땅한 가방을 할머니께 가져가서 이건 어떻겠냐고 여쭤보니 그건 ‘색이 너무 밋밋‘하단다..

역시 빌려주지 말걸 그랬어. (빌려 준 적도 없지만)


할머니 집에 한 번이라도 가봤거나 할머니랑 살고 있는 분들은 격하게 공감하시겠지만 할머니가 있는 집은 냉장고에 과일이 마를 일이 없다. 우리 집 사람들은 꺼내놓지 않으면 먹지를 않는다면서 매일 여러 개 깎아서 넣어놓는 락앤락 통. 어릴 땐 씨를 잘 발라먹지 못하는 동생과 나를 위해 벗기기도 어려운 물컹한 포도껍질까지도 벗겨 놓으셨다. (엄마는 늘 과한 애정이라며  혀를 차곤 하셨지만) 기본적으로 늘 있는 사과, 배, 바나나. 그리고 계절별로 찾는 과일들이 있다.


겨울 내내는 손에서 떨어질 새 없는 귤. 제주도 할머니들은 귤을 너무 드셔서 혈당 수치가 높으신 분들이 많다던데 끊을 수 없는 새콤 달달함은 만국 공통일 것이다.

초봄에는 겨우내 익어낸 딸기들. 다 익지 않았을 때는 무조건 설탕을 듬뿍 뿌려 주신다. 가끔은 이 정도 설탕이면 없던 당뇨병도 생기겠다는 걱정도 잠시 들곤 하지만 맛있으니 거부할 수 없다. 봄이 완연히 접어들 때쯤엔 무같던 참외가 달아진다. 간간히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보면 할머니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셔서는 노인정에서 가져온 과일이라며 공부를 너무 오래 하는 거 아니냐는 걱정 아닌 걱정과 함께 간식으로 먹으라고 책상에 슬며시 놓고 가신다. 할머니, 공부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거라고요!라고 외쳐보지만이미 할머니는 사라진 후다. 설탕에 절인 무같은 달짝지근한 겉표면에 이어 내부를 받쳐주는 폭신한 코어를 가진 잘 익은 샛노란 참외를 먹을 때면 여름이 오고있구나 실감한다.

아지랑이가 가득한 여름이 되면 자몽을 먹는다. 우리 집에서 자몽은 우리 집에서 할머니랑 나밖에 먹지 않는데 할머니가 나를 자몽 파트너로 생각하시는 건지 늘 자몽을 반으로 잘라 반은 본인이 먹고 내 것은 설탕을 뿌려 꼭 냉장고에 남겨놓으신다. 자몽도 수박도 결대로 썰어 숟가락으로 파먹는 묘미가 있다. 자몽은 처음 입에 넣었을 때 느껴지는 극강의 신맛에 한껏 인상이 찌푸려질 때쯤 이를 대비해 겉에 뿌려놓은 설탕이 황급히 혀를 달래주면 신맛의 고통이 미화되곤 하는데 이과정을 반복하게 되는 게 묘미다.

그리고 포도. 나는 서걱하고 씨가 없는 서양 포도보다는 씨가 있어도 묵직하게 말캉한 우리나라 포도가 좋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복숭아도, 자두도, 포도도 말캉해야 단맛이 극대화된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인 건지. 어찌 되었던 여름은 찌는듯한 더위에 당이나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함께할 수 있는 과일이 많다는 점이 이 계절을 싫어할 수 없게 만든다.

가을은 구황작물 수확의 계절이라 사실 과일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못하지만 우리나라 과일의 대표주자인 사과와 배가 제 기량을 뽐내는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근래에는 저장기술이 좋아져 어느 계절에 먹어도 맛난 건 부정할 수 없지만 기술의 발달이 ‘그때 밖에 먹지 못하는 맛’에 대한 감사함을 희미하게 하는 것 같아 어딘가 섭섭하다.


이렇게 과일과 함께하다 보면 사계절이 지나가 있다. 과일이던 사람이던 힘들 때나 기쁠 때 함께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단 것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꽤나 큰 버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들과 함께 지나온 추억들이 쌓여가며 농익는 관계들, 또 ‘과일’이라는 존재는 고기와는 다르게 인위적이지 않아 자연이 준 선물 같다는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자면 오글거리긴 하지만 항상 함께하고 있어 오글거린다는 핑계로 감사하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가족들에게도, 과일들에게도 오늘은 고맙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물론 많은 과일을 접하게 해 준 방부제에게도 감사함을 표하며, 나도 언젠간 과일처럼 쓴맛이 가득한 세상 속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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