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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Jul 15. 2023

14. 할머니의 회덮밥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할머니의 하루는 분주하다. 무슨 볼 일이 그렇게 많은지 부산하게 움직이시는 할머니를 보면 평일에 일을 했다는 핑계로 주말에 하루종일 누워만 있는 내가 한없이 게을러 보이곤 한다. 아침에 일어나 계란 후라이를 - 동생은 완숙, 내 건 반숙으로 - 먹고 싶지 않은 날에도 이미 구워져 있기 때문에 선택권은 없다. 보통은 바나나와 시리얼인데 가끔씩 키위나 사과 같은 요상한 조합의 과일을 그릇에 담아주시면 우유를 부어 먹는다. 마지막으로 시원한 보리차와 함께 땅콩버터와 잼이 듬뿍 발린 모닝빵을 먹으며 근황 몇 가지를 나누곤 한다. 할머니는 자기 몫만 드시고 소파로 가셔서 티브이를 트신다. 할머니랑 얘기할 때 그전엔 두 번 얘기했던 일들을 이제는 세네 번씩 설명해야 기억해 내기도 하신다. 기억창고 저 너머로 넘어가 영영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지만. 우리 가족은 기본적으로 수가 많아서 어떤 일을 한 명씩 한테만 얘기해도 최소 5번. 힘들지 않은 날에는 최대한 구석구석 설명해 주려고 하지만 선천적으로 인내심이 적은 나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엊그제는 소파 옆 할머니의 작은 책장 위에 있는 일기를 훔쳐봤다.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미리 말씀드리자면 근본적으로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글감 참고를 위해 보는 것입니다.라고 변명해 보지만 삐뚤빼뚤한 글씨와 할머니만의 맞춤법으로 꾹꾹 적어 내린 할머니의 기록장을 읽고 있으면 귀여움에 미소가 지어져 가끔 보게 되곤 한다. 아마 재작년 즘부터 할머니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일기를 쓰기 시작하셨다. 아마 본인도 자신의 머릿속에 기억들이 차츰 옅어 저 간다고 느껴져서 일 것 같다. 홍 xx 씨와 함께 노인정에서 감자를 쪄먹은 일, 손자가 취업을 해 가족이 다 같이 '절겁게' 외식을 한 일, 은행에 가던 길에 뭐 하러 가고 있었던지 까맣게 잊어 집으로 다시 돌아온 일... 매일은 아니지만 한, 두줄 그날의 기록을 읽고 있자면 전쟁터 같던 나의 하루와 다르게 할머니의 하루하루는 어린 시절 여름방학 베란다에서 할머니가 빨래를 너시는동안 대나무 장판에 누워 투니버스 만화를 보며 느끼던 안온함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는 한 주를 잘 이겨낸 나에게 주는 보상으로 일주일에 한 번 특별한 음식을 먹곤 한다. 요즘은 일주일에 한 번 집에서 미리 소분해 놓은 연어회를 먹는 게 삶의 낙이고, 수능을 준비할 당시는 떡볶이였다. 중학생 시절 여름, 할머니는 수산물시장에서 사 온 냉동 참치로 회덮밥을 한번 해주셨는데 시중에 파는 어떤 회덮밥 보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할머니의 흑미 회덮밥이 나는 좋다. 예전엔 할머니가 하라는 대로 똑같이 따라 해도 어딘가 어설펐는데 근래에는 제법 할머니의 맛을 낼 수 있게 된 음식 중 하나다. 우선 오이와 당근을 얇게 채를 썰고 상추는 숨이 죽으면 부피가 작아지기 때문에 4등분으로 큼직하게 썬다. 그리고 양재기에 냉동 참치를 해동하지 않고 깍둑 썰어 먹고 싶은 만큼 담은 후에 따뜻한 밥을 미리 얹어두면 양념이랑 같이 섞을 때쯤엔 부드럽게 녹아 윤기가 돈다. 그 위에 썰어놓은 야채를 얹고 날치알(옵션), 고추장과 초장, 통깨와 참기름을 부어 치대듯이 비벼주면 어느 재료 하나 따로 놀지 않는 회덮밥이 완성된다. 여기서 '치대듯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보통 생각하는 비빔밥에 쓰이는 고슬밥이 아니라 수분을 가득 담아 떡이 되기 직전의 밥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떡이 진 밥도 잘 안 비벼진다며 여기다 국물을 더 넣어 비비신다.) 수능을 준비하던 시절 먹는 시간을 아껴 공부한다고 하루에 한 끼만 먹다가 무더운 여름날 집에 오던 길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쓰러지고 일어나 다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던 나에게 할머니가 양재기에 비닐을 씌워 회덮밥을 가져다주셨는데 그 회덮밥을 울면서 먹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중요한 대회나 시험을 치기 전에 일본어로 이기다(카츠)와 비슷한 발음의 가츠동을 먹는다고 들었는데 그날 이후로 회덮밥이 나에겐 '카츠'동이 되어 가끔 힘이 들 땐 늘 할머니의 회덮밥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마음이 버무려진 회덮밥.


살다 보면 눈치채지 못하다가 갑자기 나이가 든다고 느껴지는 골짜기들이 있다. 우리 집은 특히나 평균 연령이 높아 그 구간이 더 여실히 느껴진다. 내가 나이 드는 만큼 예전에는 나한테 한 번에 이해를 못 한다며 핀잔을 주던 이들이 이제는 한 번 설명해 주는 걸로는 까먹어버린다거나 이해를 못 하는 일이 잦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슬픈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또 마냥 그렇지도 않은 것이 불같던 성격들이 속된 말로 손톱, 발톱이 다 빠진 상태가 되어 한없이 물렁해진 모습이 한편으론 귀엽기도 하고 이제는 내가 지켜주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들기도 한다. 나는 이런 변화를 '늙어간다'라고 표현하기보단 '변해간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이전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도, 늙고 낡아가는 내가 되기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우리 가족들과 옹기종기 모여 티격태격 함께 시간을 곱씹는 하루하루가 이제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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