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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dypoty Jun 06. 2023

13. 할머니의 김치볶음밥

할머니의 밥상, 그리고 나 

지난번 글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독자분들께서 읽어주셨다. 쓴 사람이야 내가 쓴 글이니 애정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아무 홍보도 하지 않은 글을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실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새로웠다. 지난주 나이키 조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에어'라는 영화를 보던 중 감명 깊었던 ('신발은 그냥 신발일 뿐이죠, 누군가 신기 전까진') 대사를 인용하자면 말 그대로 그냥 글일 뿐인 것이다 누군가가 글을 읽어주기 전까진. 독자분들의 절반 이상은 아마 손틈사이로 스쳐간 인연일지 모른다는 사실이 애석하기 그지없지만 이번 기회로 어떤 부분이 독자분들을 끌여들였을까 여러 방면으로 고민해 보려 했지만 이 부분은 추후에 이 글이 운이 좋아 편찬을 하게 된다면 만나게 될 전문가님께 여쭤보는 것으로 하고 지금은 그냥 '쓰던 대로 쓰자'라는 시작에 비해 빈약한 결론에 다다랐다.(고 하기엔 사실 어떤 가이드를 받더라도 반영할 수 있을 정도의 문체력은 없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어느새 브런치에 글을 써오기 시작한 지 2년이란 시간이 조금 넘어가는 것 같다. 시험공부를 할 때에는 공부 이외의 것들이 가장 재밌고, 직장생활을 하기 시작한 후로는 일하는 것 말곤 다 재미있어졌다. 원래도 책을 읽는 일을 즐겼지만 글로 쓰고 남기는 일이 왜인지 손에 맞았던 것 같다. 처음엔 상황에 따라 3개월에 한 번, 6개월에 한 번, 긴 글이 쓰기 힘들 땐 블로그를 오가며 정해짐 없이 써왔지만 이렇게 내버려 두었다간 이번 생에 한 부작이 끝날 것 같지 않아 한 달에 최소 한 개의 글을 써 나가기로 나름의 룰을 정했다. 주제가 정해져 있어도 긴 글을 쓴다는 건 작지 않은 부담이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정해진 한 달의 끝이 다다르게 될 때 쯤엔 누가 감시하거나 보채고 있지도 않는데 알 수 없는 압박에 휩싸이는 일을 반복해오며 이제는 어느 정도 나만의 루틴을 구축해가고 있다. 직업으로서 작가가 된다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글을 쓰고 내 시간을 가지고 여기저기 답사를 다니는 행복의 무한회로를 돌리며 상상의 풍선껌을 있는 힘껏 불다가 문득 그렇지만 과연 글이 밥벌이가 된다면 이 작업도 과연 즐겁기만 할까 풍선껌을 너무 크게 불어버리는 바람에 머리가 지끈 아파올 때쯤 터트려버렸다.


영감을 받겠다는 취지 아닌 빌미로 우연찮게 '같거나 다른' 사진전에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같은 시간대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다른 일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주제로 찍은 사진전이었다. 내가 그 사진전을 보러 갈 때쯤 할머니는 노인정 친한 할머니한테서 진통에 좋은 약이라고 받은 패치를 몸에 붙이시고 있다가 알고 보니 호스피스 병동에서 쓰일 정도로 강한 약성에 더군다나 할머니와 맞지 않는 성분이 들어서인지 밤새 화장실을 들낙거리시면서 헛구역질을 하시고 혈압계가 측정하지 못할 정도로 혈압이 오르내림을 반복하셨다. 약효가 내려가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이 방법이라 가족 모두가 걱정하면서도 단지 친한 친구가 줬다는 이유로 확인도 하지 않고 써버린 할머니한테도 화가 났다. 또 그날에 북한에서 오키나와 방면으로 쏜 미사일 때문에 엉뚱하게 서울 시민들은 대피 문자를 받았고 남자친구는 정말 미사일이 우리나라에 떨어졌다면 아무 의미 없어질 모 기업에 면접을 보러 갔다. 어떤 이는 어떤 일 때문에 울고, 웃고, 생에 첫날이 되기도 하고 마지막날이 되기도 한 날에 월 마감을 하러 가는 회사 출근길 아침 지하철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이가 들며 집에 올 때쯤엔 몸 또는 마음 둘 중 하나는 녹초가 되곤 한다. 둘 다 녹초가 되지 않는 날도 있고 때론 둘 다 녹초가 되는 날도 있다. 이럴 땐 할머니의 '백투 더 베이식'한 김치볶음밥이 생각난다. 할머니의 김치볶음밥만큼은 전수받았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는 김치 본연의 맛이 좋아야 한다는 점이다. 김치가 준비됐다면 먼저 수분이 모두 날아갈 때까지 볶은 후 약간 탈 때쯤 밥과 참기름을 넣고 자작하게 볶는다. 그리고 마무리로 김가루와 다량의 깨. 빠질 수 없는 계란 반숙. 완숙을 얹는 것을 선호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온전히 "Sunny" 사이드 업 한 노른자의 한가운데를 깨 노란 진액과 모든 재료가 버무려졌을 때 김치볶음밥은 완성됐다고 볼 수 있다. 혹시 조금 더 몸이 본격적으로 안 좋을 땐 쯤엔 멸치 국물을 베이스로 푹 끌인 김치콩나물 죽은 약간은 떨어졌던 한국인 적정 나트륨량을 채워줄뿐더러 떠나갔던 몸의 온기도 언제 그랬냐는 듯 홈스위트홈하게 할 수 있는 맛이라고 할 수 있다. 할머니께서 식당을 하셔서 더 많은 분들이 맛보지 못함은 애석할 따름이다. 만약 먼 미래에 독자간담회를 하는 날이 온다면 사은품으로 오신 분들께 글에 나온 할머니의 음식을 한 가지씩 드리는 것은 어떨까 또 한 번 상상하며 긴 연휴 끝 살벌하게 가까워지는 출근길의 압박을 가까스로 피해 본다. 할머니 그때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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