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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갭 - 대학편

우리는 대학에서 학문을 익히는가, 아니면 주량을 기르는가

by 담백

과외 선생님과 만나고 나 자신에 대해 알아가며 중요한 시점에 이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덕분에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화학을 공부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뚜렷한 목적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맞는 공부 방법을 찾기엔, 제대로 된 시험 공부를 해본 적도 없었고, 대학을 가긴 가야겠지만 남들처럼 부모님을 따라 발 빠르게 입시 설명회를 간다거나 입시 결과를 검토하며 내가 갈 수 있는 수준을 가늠할 만한 성적도 준비된 게 없었다.


다만 내가 살고 있던 지역의 교육열이 낮진 않았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중하위권이라면 고등학교 3학년부터 공부를 시작하더라도 중간 정도는 가지 않겠냐는 근거 없는 자신감까지 더해진 결과였다.


그러던 중 고등학교 3학년 3월, 처음 모의고사를 봤다. 왜 '처음' 이라고 하는가, 의문이 들 수 있다. 수시, 정시 개념도 없던 나는 모의고사 준비는 커녕 모의고사로는 내 실력을 판단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고등학교 2학년때까지는 시험지를 받자마자 읽지도 않고 OCR카드에 일자로 마킹을 하고 자버리곤 했다. “모의고사 점수는 아무 의미 없다”는 자기합리화 속에, 쿨하게 자버리는 행동이 왠지 자랑스러웠던 시절이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가

그렇게 내 생애 첫 모의고사에서 거침없이 나의 진짜 실력을 선보였고, 고3 첫 모의고사 성적표가 내 손에 떨어졌다. 국어 6등급, 영어 7등급, 수학 8등급, 화학 7등급, 물리 8등급.
차라리 시험지를 보지 않고 OCR 카드에 마킹만 했던 예전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눈앞에 펼쳐진 이 현실을 외면하고만 싶었다.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이 성적으로는 개뿔대나 지방 2년제가 현실적이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이미 전신이 활활 타오르기 직전이였다.


그즈음 할아버지의 건강도 눈에 띄게 쇠약해지셨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에 꼭 보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고 종종 말씀하시곤 했다. 하나는 내 결혼식, 다른 하나는 내가 수도권 4년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다.

개뿔대라니. 수도권 2년제도 아닌 지방 2년제라니. 눈앞이 아득했고, 머리는 멍해졌다.
무의식중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재수를 한다면… 그래도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내가 꼭 합격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까?’

남들이 나를 믿지 않을 때도 늘 지지해 주셨던 분이기에, 유일하게 해드릴 수 있는 건 한 번에 붙는 일이었다.
재수를 하기엔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께서 기다려 주실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또 2년을 더 공부한다고 해서 결과가 극적으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지금, 이 한 번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를 내자. (그리고 할아버지는 정말로 그다음 해, 세상을 떠나셨다.)


나에게 맞는 공부방법 찾기

선생님께서 본업을 시작하시면서 과외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고, 나는 그 선생님을 마지막으로 과외를 그만두게 되었다. 학원도 몇 군데 들락거렸지만, 결국 학원 안에서의 경쟁과 압박은 나와 맞지 않아 정리하는 수순을 밟았다.


그런 경쟁도 참고 견뎌야 할 때가 있고, 실제로 단기간의 성적을 끌어올리는 데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게 필요한 건 단기 성적이 아니라 ‘오래 달리기 위한 방법’이었고, 경쟁 속 압박은 그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하튼, 학원가 근처에 산다는 굴러들어온 메리트를 내 발로 차버린 셈이었다.

나름 자기주도학습이라고, 혼자 책상에 앉아 몇 시간씩 공부해 보았지만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어디쯤 와 있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EBS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공부의 왕도’라는 프로그램을 발견하게 되었다. 나에겐 마치 구세주 같은 프로그램이었다.


‘공부의 왕도’는 매 화, 전국 최상위권 성적을 받은 학생들의 공부 비법 한 가지씩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그들의 성공 스토리의 결말은 나와 거리가 멀어 보였지만, 적어도 ‘공부 방법’을 찾아갈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그렇게 공부의 목적성과 방법이 조금씩 자리 잡히니, 공부에 전념하기 위한 단단한 지지대가 마련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간과의 싸움

다만 나에겐 남들과는 다르게,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머리라도 좋았다면, 적성검사 대비반에 들어가 그 방법으로라도 접근할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대비반 진단평가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이제 남은 건 수시 혹은 정시. 애매한 가능성에 희망을 거는 수시보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정면 돌파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정시에 올인하게 되었다.


19년 만에, 머릿속에 출발 신호가 울렸다. 잠은 하루 두 시간으로 줄였고, 식사 시간마저 아까워 삼시세끼를 전부 자리에 앉아 쉐이크로 해결하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혼자 집중할 수 있는 방이 없었기에, 학교가 끝나면 양팔을 벌리면 벽에 닿는 작은 고시원 방으로 향했다.


여러 친구들이 모여 있는 독서실보다는, 오히려 혼자 조용히 집중할 수 있는 고시원이 나에게는 더 큰 안정감을 주었다. 남들이 푼 문제집을 하나하나 다시 사서 풀어볼 여유는 없었다. 금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그건 사치였다. 대신 나는 모든 과목에서 EBS 강의와 수능 개념, 특강, 완성, 파이널이라는 네 단계 교재를 10번씩 풀이하는 방식으로 목표를 간소화했다.


목표가 단순해지자 하루에 해야 할 분량이 자연스럽게 정해졌고,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니 마치 스위치를 켠 듯 공부에 스퍼트가 붙기 시작했다. 매달 모의고사를 치르며 주변에서 희비가 엇갈려도, 나는 나만의 루틴을 지켰다. 무더웠던 여름방학에 한 차례 쓰러진 이후로는 수면 시간을 5시간으로 늘렸지만, 매일 아침 7시에 학교에 가서 잠들기 전까지 공부하는 일상은 수능을 보는 당일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마침내, 수능 당일. 전 과목 올 3등급이라는 기적 같은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지금까지 봤던 모의고사 중 최고의 성적이라 더 감격스러웠다. 원하던 수도권 4년제 대학 몇 곳에 원서를 넣었고, 모두 합격했다. 가족들의 축하 속에, 드디어 나는 꿈에 그리던 대학 생활을 꿈꾸며 대학의 문을 열었다.


이상과 현실의 갭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대학은 내가 상상했던 모습과는 꽤 달랐다. 고등학교 시절 꿈꾸던 대학은 자유롭고 지적인 공간일 거라 믿었다. 스스로 원하는 것을 배우고,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확장시켜 나가는 곳일 줄 알았다.


그런데 실제 대학 생활은 생각보다 단순했고, 또 다른 시험과 경쟁의 반복이었다. 입학 첫 주, 강의보다 더 먼저 찾아온 건 연이은 술자리와 환영회였다. 오리엔테이션에서는 전공이나 수업보다는 '누가 잘 마시냐'가 더 중요한 화제가 됐다. 낯설고 어색한 이 분위기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느낌이 들었다.

시험도 특정 족보만 잘 보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는 구조였다. 술을 잘 마시고 선배들과 친한 몇몇 친구들은 족보를 받아 시험 몇 주 전부터 단기 집중으로 높은 성적을 냈다.


반면 나는 매일 수업을 복습하고 개념을 정리했지만, 시험 범위가 워낙 방대해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겨우 중간 정도의 성적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강의는 출석 체크로 채워졌고, 수업이 끝난 뒤 질문이라도 하면 “수업 길어진다”며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내가 그렇게 바라던 '자유로운 지성의 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등학교처럼 꾸준히 공부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다. 노력보다 정보, 성실함보다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구조 속에서 나는 다시 방향을 잃는 기분이었다.


분명 꿈꿨던 곳에 왔는데, 정작 내가 갈망했던 대학은 없었다. ‘내가 너무 유난스럽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켠이 허전했고, 무엇을 위해 이토록 달려왔는지 스스로 의문이 들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혼밥이 익숙했고, 공강 시간엔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수업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직행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내가 문제인 걸까, 대학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한국이 문제인 걸까?



이상과 현실의 갭 - 대학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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