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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떠난 영국

낯선 땅에서 만난 내 삶의 가장 낮은 곳

by 담백

새내기 배움터, 일명 새터라고 불리는 1박 2일 오리엔테이션 여행에서 주량이 센 친구도, 약항 친구들도 시간의 문제였을 뿐, 결국에는 모두 정신을 잃어갔다. 그들이 똑같이 겪었을 과거의 악습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고, "라때는 더했다"는 말로 정당화했다.


계속되는 술 강요에 악을 쓰며 버티던 친구들 마저도 하나둘 바닥에 쓰러져가는 상황 속에서, 미안함이나 걱정보다는 묘한 우월감에 비열하게 낄낄대며 웃는 선배들의 얼굴이 어딘가 사람 같지 않게 느껴졌다.


다음날 오후, 선배들은 과대와 부과대를 뽑아야 한다며 동기들을 불러모았고, 아직 술이 덜 깬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자 선배들은 과대와 부과대만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이 있다며 숨겨둔 베네핏을 꺼내 들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통틀어 단 한 번도 반장 후보에 나선 적 없던 내가, 그 말 한마디에 손을 번쩍 들고 말았다.


선배들이 여자가 과대를 맡으면 힘들 거라며 손사래를 치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부과대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다행인것 같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나에게 학과의 크고 작은 행사마다 이어지는 술자리는 버거운 일이었고, 게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런 장학금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되돌리기엔 이미 늦어버렸고, 학과 행사마다 빠질 수도 없는 부과대라는 타이틀은 내겐 그저 짐일 뿐이었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도 벅찬 상황에서 직책까지 떠맡으니, 내 안의 비사회적 성향은 점점 커져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학년 여름방학 무렵,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직후부터 할아버지의 건강은 눈에 띄게 나빠지셨고, 결국 교통편이 불편한 외지의 요양병원으로 옮기시면서 자연스럽게 왕래가 뜸해졌다. 게다가 학과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시작했던 힙합 댄스 동아리 활동을 못마땅해하시던 할아버지와 작은 말다툼을 계기로, 우리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졌다. 나는 그 틈을 좁히지 못한 채, 끝내 할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살아생전 할아버지와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부족함 없이 잘해드렸다 생각했지만,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송함이 마음 깊이 사무쳤고, 그 아득하고 무거운 감정이 나를 짓눌렀다.


그렇게 힘들게 준비했던 입시생활은 시간이 흐르니 무뎌지고, 좁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상과 현실의 갭에 그저 나를 옥죄여오는 학교라는 좁은 사회를 벗어나고만 싶어졌다.


"아무래도 자퇴해야 될 것 같아요", 조심스레 엄마께 말을 꺼낸 날, 엄마는 과외선생님과 처음 만난 날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엄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1학년은 다녀보고 다시 생각하자."


나는 차선책으로 교환학생을 생각했지만 학과 특성상 지원조차 불가능했다. 주변 친구들은 이대로만 다니면 취업에 문제없는데 뭐 하러 해외를 나가고 싶어하냐며 의아해했다. 그 반응은 학과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을 설명드려도 돌아오는 건 패배자를 향한 무관심한 표정과, "추천서는 어렵다"는 말뿐이었다. 그 이후부터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국을 떠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머리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주변친구들에게 만약 한국을 나간다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라며 배수진을 쳤다. 다짐인지 허세인지 모를 말이었지만, 그 말로 내 발을 묶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쉽게 흔들릴 것 같았다.


그렇게 기약도 없는 유학을 위해, 나는 학기 중에도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최소 두 가지씩 병행하며 일 년 치 학원비 정도의 비용을 마련하려고 애썼다. 만약 안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은 다해야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체력이 좋아서 쓰러지는 일은 없었음에 감사했다.


그렇게 일학년을 마무리하던 즈음, 내게 기회가 왔다. 엄마 회사 동료 아저씨의 아내분과 10살짜리 아들이 영국에서 따로 떨어져 살고 있는데, 아내분의 업무 시간 동안 아이를 봐줄 오페어 (au pair : 외국인 가정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대가로 숙식과 일정량의 급여를 받는 것)를 구한다는 소식이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꽤 넉넉한 돈을 받는 직업이었지만, 숙식 제공과 소정의 생활비만을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앞뒤 가릴 것 없는 상황이었기에 학원비도 마련된 상황에서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다고 느껴졌다. 엄마께 아저씨와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고 내가 적임자인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하며 아저씨를 설득했다.

될 일은 되게 돼 있다는 말처럼, 그 뒤의 절차는 마치 물 흐르듯 진행됐다. 학교에 휴학계를 내고, 친구들에게는 “다신 날 볼 일 없을 거야”라며 허세 섞인 인사를 전했다.


엄마는 편도 비행기 티켓과 약간의 여비를 건네며, 나에게 정말 괜찮겠냐며 몇 번이고 물었다. 그때의 나는 이미 영혼은 런던 히드로에 먼저 가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한국에 돌아오는 일은 없을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내 인생 첫 영국행 비행기를 타러 가는 날. 앞으로 1년은 볼 수 없을 가족에게 인사를 하는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그저 내가 이 '지긋지긋한 한국을 뜬다'는 해방감에 완전히 취한 상태였다. 그렇게 공항 앞에서 나와 같이 살게 될 이모(라고 불렀다)와 에덤을 처음 만났다. 삐쩍 마른 몸에 까무잡잡한 피부, 작은 키 때문인지, 애덤은 낯선 사람인 나를 경계하듯 치켜뜬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 지어 보였지만 등골이 살짝 서늘해지면서 아차 싶었지만 이미 모든 것을 걸고 건너온 길이었다. 되돌아갈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13시간을 날아 영국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시간이라 공항에서 집까지 달리는 길은 한국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택시를 타고 한 시간 반 정도 걸려 작은 이층 주택들이 즐비한 거리에 도착한 집 앞에서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시니 ‘아, 내가 영국에 왔구나' 느껴졌다. 내가 머무를 집은 뒤로 3평 남짓한 정원이 딸려있었고 2층 방은 싱글 매트리스를 놓으니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작았다. 간이 책상하나 놓기도 빠듯한 단칸방이었지만, 어차피 한국 집엔 내 방조차 없었기에 이 공간마저 왠지 ‘영국답게’ 느껴졌다. 해리포터가 된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다음 날, 사건이 벌어졌다.

긴 장거리 비행으로 피곤할 틈도 없이 바로 출근해야 했던 이모는, 키 꾸러미 두 개를 내 손에 쥐여주며 “오늘은 혹시 모르니 절대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유난히 화창한 날씨에 창밖을 보고만 있자니 몸이 근질거렸다. 애덤도 심심해하는 눈치였고, 나는 잠깐 산책이라도 다녀오자며 부추겼다.

눈앞에는 10개의 키 다발과 2개의 키 다발이 있었지만, 어느 것에도 태그가 없었고 내겐 전부 비슷해 보였다. '10개 중 하나쯤은 집 열쇠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그게 악몽의 시작이었다.

10분 남짓 동네를 둘러보고 돌아왔을 때, 나는 손에 쥔 10개의 열쇠로 집 문을 하나씩 열어봤지만, 어느 것도 맞지 않았다.


이마엔 식은땀이 맺히고, 애덤은 목이 마른 와중에도 심심하다며 계속 징징거렸다. 하는 수 없이 정원에서 공을 가지고 한바탕 놀아줬더니, 금세 지쳐 보였고 탈수 증세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핸드폰은 있었지만 아직 개통이 안 되어 이모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빼꼼히 열린 이층 창문으로 들어가 보겠다며 간이 사다리를 탔다가 그만 떨어졌고, 온몸에 멍이 들고 상처가 났다. 하지만 내 몸 상태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어떻게 온 영국인데, 이대로 내쫓기면 어떡하지 머릿속이 혼비백산했다.


업무로 늦은 밤에야 돌아온 이모는 꼬질꼬질해진 우리 모습을 보더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는 아직 이모의 이름 석 자밖에 모르는 상태였고, 그런 상황에서 건넨 첫인상은 최악이었다.

그날 이후 애덤은 며칠 동안 고열과 염증에 시달렸고, 나는 하루 종일 곁을 지키며 간호했다. 죄책감과 가시방석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고, 밤마다 후회로 눈을 감지 못했다.

사건이 정리된 며칠 뒤, 엄마와 영상통화를 하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애써 태연하게 굴었지만, 내 얼굴을 본 엄마는 화면을 보자마자 물었다. “어쩌다 얼굴에 멍이 들었어?”

그 순간, 단단하게 붙들고 있던 긴장이 와르르 무너졌다. 나는 엄마 속이 문드러지는걸 알면서도 엉엉 울고 말았다.

어른들 말 틀린 것 하나 없다. '역시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그땐 몰랐다. 이게 빙산의 일각이였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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