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도 없이 뻗은 가지가 된다는 것
아침 6시 30분, 영국에서의 나의 하루는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뜨며 시작됐다. 오전 8시까지 에덤을 학교에 데려다줘야 했기 때문이다. 대개 전날 밤 서러움에 울며 잠들었던 탓에 잔뜩 부어버린 얼굴을 차가운 물로 가라앉히고, 에덤을 깨우러 갔다. 학교까지 10분 거리였지만 잠이 깨지 않아 칭얼거리는 에덤의 팔과 다리에 옷을 끼워 넣고, 나무늘보처럼 소가 여물 먹듯 시리얼을 떠먹는 애덤을 재촉해 작은 손을 꼭 잡고 집을 나서기까지는 시간이 생각보다 빠듯했다. 아침 인사를 주고받느라 북적거리는 엄마들 틈을 지나 담임 선생님에게 에덤을 맡기고 나면, 비로소 한숨 돌리며 내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런던에 있는 학원까지 기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번헴이라는 마을은 기찻길을 따라 이층 정도의 벽돌집들이 늘어선 동네였다. 기찻길에서 얼마나 가까운지에 따라 빈부가 명확히 구분되는 곳이었지만 그곳 사람들은 너무 급박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느긋하지도 않은 적당한 여유가 몸에 배어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찰나의 여유를 채 느끼기도 전, 빠듯한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동네의 작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자전거 페달을 힘껏 밟으며 아침 공기를 폐 깊숙이 들이마시는 시간이 그나마 하루 중 드물게 느낄 수 있는 자유였다. 그마저도 어느 날 자물쇠를 묶어둔 앞바퀴만 덩그러니, 자전거를 도둑맞아 버려 결국 한 달 일당보다 더 비싼 자전거 값을 이모에게 물어줘야 했지만.
학원의 오전 수업은 고작 세 시간 남짓이었다. 종일반 친구들과 달리 내게 허락된 공부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그 짧은 세 시간 동안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집중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다시 집에 돌아가는 기차에 올라탔고, 돌아가는 길엔 간단히 싸 온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고 그날의 신문 한 귀퉁이에 있는 스토쿠를 푸는 일을 좋아했다. 오후 1시가 되면 다시 학교 앞으로 돌아가, 나를 기다리는 에덤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 오후 일과가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처음 만난 에덤은 한국 나이로 열한 살 쯤이었다. (원래 그 나이대에 못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상식선으론 그 나이답지 않게 혼자 샤워하거나 신발 끈을 묶는 일이 서툰 아이였다. 이모가 에덤의 샤워를 도와달라 부탁했을 때, 그것만큼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했다. 다행히 에덤 역시 씻는 일에 나의 손길을 원치 않았다.
에덤은 다섯 살 때 영국으로 이민을 와서인지 반쯤은 영국인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청소를 시작하면 바짝 붙어 따라다니며, 조금이라도 물건을 옮기려 하면 "이건 우리 집 거니까 건드리지 마"라며 퉁퉁거렸다. 당시에는 그런 모습이 너무 얄밉고 귀찮았는데, 돌이켜보니 그것 또한 에덤과 나 사이에 미운 정이 쌓여가는 과정이었나 싶다.
우리는 자주 다투곤 했는데, 한국어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던 에덤은 자신 있는 영국식 억양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내가 영어를 더듬거리기라도 하면 "지금이다!" 하는 표정으로 신나게 내 발음을 지적했다. 'world'의 w 발음부터 'tomato'의 인토네이션, 'pizza'의 정확한 발음까지, 쪼그만 악마가 만족할 때까지 하루에도 수십 번을 반복해야 했다. 열한 살짜리였지만 내가 에덤보다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자존심은 잠시 접어두고 애덤을 작은 선생님처럼 여기며 기를 쓰고 따라 배우려고 애썼다.
어리광을 받아주는 일도 때론 버거울 때가 있었다. 스무 살의 나는 한창 친구들과 어울리고 놀고 싶은 나이였고, 그런 내가 낯선 나라, 낯선 사람의 집 안에 갇혀 남의 아이를 돌보는 처지가 때로는 처량하게 느껴져 서글펐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학교로 돌아가는 것보다 낫다며 애써 스스로를 다독이며 그 모든 시간들을 묵묵히 견뎌냈다.
이모는 회사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약속한 저녁 6시에 귀가하는 날은 거의 없었다. 보통 밤 8시나 9시가 되어서야 돌아왔고, 나는 그때까지 에덤과 함께 있어야 했다. 긴 오후를 보내며 애덤의 숙제를 봐주고, 간식을 챙기고, 함께 배드민턴을 치거나, 보드게임을 했다.
한편으론 오히려 이모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 내게는 더 마음 편하기도 했다. 이모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거창한 저녁 차리기'였기 때문이다. 맛있는 요리를 먹는 건 좋았지만 그만큼 접시가 많이 쓰였고, 그 많은 접시의 설거지와 뒤처리는 내 몫이었다. '요리를 내가 했으니 설거지 정도는 네가 해야지'라는 게 이모의 논리였지만 내가 맡은 집안일은 설거지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집안일을 돌보기 힘든 이모의 여건 상 산더미처럼 쌓인 빨랫감을 처리하는 일부터 제멋대로 자라 있는 정원의 조경관리까지, 어린 마음에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또 이 집에서 쫓겨나지 않겠다는 절박함 때문에 하나씩 일을 떠맡다 보니 어느 순간 나는 '토털 하우스키퍼'로 전락해 있었다.
이모는 본인이 한 음식을 남기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곤 했지만, 다이어트를 핑계로 직접 처리하는 걸 꺼렸다. 자연스럽게 잔반 처리 담당이라는 직책이 하나 늘었다. 이왕 '숙식 제공'인 거 그냥 이 집에 있는 모든 음식들을 먹어치워 본전을 뽑아내자라는 결심과 영국 특유의 고칼로리 디저트 문화가 시너지를 이루어 1년 만에 내 몸무게는 72kg까지 늘어났다. 1년 만에 공항에서 만난 엄마, 아빠가 나를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불상사가 벌어졌지만 말이다. 살이 찌면서 춤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 다쳤던 무릎이 통증이 느껴졌지만, 정작 내가 만나던 주변의 영국 아줌마들은 워낙 덩치가 컸던 탓에 나를 볼 때마다 넌 아직도 "skinny"하다라고 너스레를 떨어대는 통에 내가 얼마나 살이 쪘는지 자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학원이 방학하거나 수업이 일찍 끝나 잠깐 시간이 나면, 나는 마을 중앙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처음엔 로알드 달의 책을 빌리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하게 됐는데 그곳 한편에 마련된 그룹룸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체스를 둘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그날 이름도 모르는 초등학생과도, 때론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와도 마주 앉아 조용히 체스를 즐겼다. 대국을 시작하기 전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게 기본 매너였고, 끝난 뒤에는 서로의 플레이에 진심 어린 악수를 했다. 국적도, 살아온 환경도 달랐지만 서로의 플레이 방식을 존중하는 프로다운 분위기가 왠지 마음을 놓이게 했다.
토요일마다 에덤은 한인학교에 갔다. 그 시간이면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나는 매주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모는 종종 나를 한인 모임에 데려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오가는 대화는 나에게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불편했다. 사람들의 얕은 농담과 공허한 자랑을 듣는 것이 지루했고, 가능하면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런 나의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나는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기 위해 어질러진 집안일이 눈에 띄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혼자만의 고요함이 절실할 때면 윈저로 향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사랑했던 그곳은 묘하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북적이는 관광객들을 피해 성 뒤편의 조용한 산책로로 들어서면, 축축한 잔디 위에 작은 돗자리를 펴고 앉아 내가 모은 스크랩북을 천천히 정리했다. 그 시간은 내게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에덤은 낮 동안 나와 즐겁게 놀다가도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순간 엄마 품에 안겨 언제 그랬냐는 듯 조잘조잘 내 흉을 봤다. 그럴 때면 "나도 가족이 있다"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싶었지만 언제나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에덤이 십 년 뒤, 존댓말로 "누나 잘 지내세요?"라며 메시지를 보내왔을 때는 소름이 돋으면서도 내가 키운 아이처럼 가슴이 뭉클했다. (근데 너.. 존댓말 쓸 줄 아는 아이였구나..?)
영국 대학으로의 진학을 목표로 영국에 온 지 어느덧 6개월쯤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내가 꿈꾸던 것보다 훨씬 더 냉정했고, 대학 진학은 점점 멀어져만 갔다. 자국민에게 지원되던 학비 혜택에 비해 외국인 학생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학비가 결국 내 발목을 잡았다. 생활비까지 감안하면 이곳에 뿌리내린다는 건 지금의 내 상황으로선 불가능해 보였다.
막막함을 견디다 못해 나와 1살 차이로 자매같이 지내온 사촌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는 항상 나와 애매한 평행선을 유지했다. 친자매는 아니었지만 가까이 살아 20년을 동고동락했고,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라고 느껴지면서도 묘한 경쟁구도를 유지했다. 언니는 나와 다르게 집안의 탄탄한 지원 속에서 자라왔고, 언니가 재수 중일 때 엄마 회사에서 나와 공부하며 “너무 힘 빼며 살지 마”라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당시 언니 또한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공감대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 반, 위로라도 받고 싶은 마음 반으로 전화를 걸어 그간의 상황을 쏟아냈다. 말을 마칠 즈음, 언니는 또 가볍게 "이제 너도 가족 걱정 그만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살아."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속으로 얕게 읊조렸다. "망할 년, 그게 됐으면 너한테 전화를 했겠냐." 그날 밤, 설움과 암담함이 한꺼번에 몰려와 몇 시간을 울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이상하게도 그 말 덕분에 유학에 대한 기대와 부담을 내려놓게 되자 마음 한편이 조금 편해졌다. 허탈했지만, 어쩌면 그것이 나에게 필요했던 냉정하지만 현실적인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시간도 흘러 학생 비자가 끝나기까지 뭘 하기엔 애매한 두 달의 시간이 남아있었고, 나는 그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영어실력이 많이 늘긴 했어도 뭔가 탁 트이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런 내게 이모는 본인 회사에서 인턴 자리가 생길 수도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제안하셨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지원서를 제출했다. 확실한 TO가 있던 게 아니라 단지 인재풀에 내 지원서를 올리는 정도였는데, 그때 당시엔 지원서를 보냈지만 답이 없던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조바심이 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경력은 없지만 시간은 남아돌던 나는 곧장 회사를 찾아가 리셉션 데스크 직원에게 구직 지원서를 제출한 사람이라며 HR담당자를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지금 생각하면 간이 배밖으로 나온 짓이다) 소파에 앉아 10분 ~20분 정도 기다리자 황당한 표정의 남자가 자길 부른 사람이 대체 누구냐며 리셉션 데스크 직원에게 물었다. 직원이 손짓으로 나를 가리켰고, 그때 아직도 그의 말이 생생히 기억난다. "oh gosh, you just popped up at the office all of sudden!" 칭찬일지 흉일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직접 찾아온 사람은 처음"이라며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는 연락을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나를 돌려보냈다. 회사 문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 심정을 담아 말했다. "어떤 자리든 기회만 주신다면 꼭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날 오후,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내일부터 출근하세요."
나는 QA 부서에 배정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근무하며 직원들의 업무를 배우고, 트러블슈팅 회의에도 참여했다. 긴 손톱에 특이한 색의 네일아트를 하고도 미세한 작업을 하던 워킹맘, 아침인사는 꼭 잊지 않아야 한다던 남직원, 엉덩이에 어린 시절 멋모르고 했던 특이한 문신이 나이가 드니 흘러내린다던 보스, 작은 일도 꼼꼼히 체크하던 인도인 직원까지, 회사의 차분한 분위기 속에 각자의 스타일을 녹여내던 직원들의 따뜻한 태도도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개중에선 '낙하산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 때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자리는 누군가 내게 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든 자리였으니까.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의 나는 무언가를 배우기보다는 '견디는 법'을 익히고 있었던 것 같다. 매일 반복되는 작은 무시와 서툴렀던 영어가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뿌리내리지 못하던 낯선 땅에서 스스로를 다시 일으켜 세우던 그 시간들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 시절이 마냥 고되기만 했던 건 아니다. 힘들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는 방법을 알아가고, 때 때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크게 웃기도 했던 순간들이 모여 평소에 보고 싶지 않던 나 자신의 가장 낮은 곳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이제는 그 시절을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