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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파리를 가로지른 이유

프랑스 여행에서 거지가 된다면 마주할 수 있는 일들

by 담백

모두가 한 해를 마무리 해갈 무렵, 학원에서 꽤 가까워졌던 미셸이 선뜻 프랑스 고향 친구들과 새해파티에 가기로 했는데 괜찮으면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프랑스에 오는 김에 친구들과 가족들을 소개해주고 자기 집에서 재워주기까지 하겠다며. 가뜩이나 집에서 도망치고 싶던 나에게 숙식을 모두해결해 주는 여행이라니, 그것도 새해를 프랑스에서 보내는 기회를 얻다니, 게다가 숙식을 모두 해결해 주는 여행이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이 이후로 현실에 있을 수 없는 좋은 제안 같은 경우 의심부터 하는 습관이 생겼다.)


마침 이모의 회사도 연말 한 주는 홀리데이였기에 타이밍이 잘 맞아떨어졌다. 이모에게 승낙을 받고 곧장 파리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봤다. 비싼 순으로 비행기 > 기차 > 버스 + 페리였는데, 반대로 소요 시간은 세제곱으로 늘어났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가는 방법은 어찌 됐던 상관없다. 나의 머릿속은 이미 새해 파티에서 모르는 사람들에 뒤섞여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해졌다.


한국에서도 가보지 못한 클럽파티라 기분 좋을 정도의 두근거림으로 한 주를 보냈다. 약간 쌀쌀한 날씨였지만 파티 분위기에 어울리게 검은색 시스루 원피스와 평소엔 아껴두고 신지 않아 발에 익지 않은 정장구두를 윤이 나게 닦아 준비했다. 캐리어를 가지고 가지 않을 여행이었기에 그 옷을 제외하곤 잠옷가지만 챙겼다. 이 와중에 멋을 내겠다고 숄더백을 챙겨간 나다. 친구는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기 한주 전 먼저 프랑스로 떠났고, 나는 그다음주에 뒤이어 떠났다.


늦은 새벽 파리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을 향해 걸어갔다. 숨을 내뱉을 때마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차가운 공기는 건조했고, 거리의 상점은 대부분 닫아 언뜻 켜져 있는 가로등 아래 부랑자들만 널브러져 있어 스산함이 감돌았지만 마음은 새해 파티에서 북적임을 상상하며 들떠있을 뿐이었다.


형형 색색의 옷가지만큼이나 다양한 나이대의 인종들이 모인 코치 스테이션엔 늦은 새벽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문득 다들 어디를 향하는 건지 궁금해져 말이나 걸어볼까 했지만 잘 시간이 지나 몰려오는 졸음에 내가 갈길이나 신경 쓰자며 정신을 다잡고 앞으로 떠날 5~6시간의 여정에 앞서 화장실을 들렀다.


자기 딱 좋은 조도의 보라색 조명이 은은하게 비치는 복도를 따라 좌석에 앉았다. 예약 당시에는 풀 와이파이 제공에 콘센트, 화장실까지 구비된 버스라고 명기되어 있었지만 콘센트는 박살 나있었고 WI-FI는 1분마다 끊겨댔다. 게다가 화장실은 "임시 수리 중"인 구제불능의 버스였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화장실도 미리 갔다 왔겠다, 다행히 전날 잠을 덜 자고 온 터라 졸음이 쏟아졌던 덕분에 도버해협을 지나 페리를 타는 선착장까지 6시간을 내리 잠들었다. "모두 내리세요"라는 운전기사님의 안내에 슬며시 눈을 떠 창문을 열자 밖이 껌껌했다. 파리로 가는 페리 안이였다.


슬슬 고파오는 배를 문지르며 페리 이곳저곳을 어슬렁댔다. 희한한 형상의 검정슈트 코스튬에 허리춤까지 땋은 머리의 유대교 사람들, 바닥에서도 널브러져 자는 히피족들, 같은 지구 위에서 이렇게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구나, 한번 더 실감했다. 우선 주린 배를 채우려 몇 가지 스낵을 골라 카운터로 가려다 왠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크고 어디서나 눈에 띄는 진한 분홍색의 장지갑을 삿건만, 죄책감에 파묻혀 가빠지는 호흡을 붙잡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버스 타기 전 들른 화장실 휴지걸이 위의 모습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꼭 손에 많은 물건을 들고 다니는 나는 그날도 지갑을 놓고 나왔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거였다.

버스 기사님을 통해 버스 회사에 문의해 달라고 자초지종을 설명드렸지만 그 여행기간 내에 찾긴 무리수였다. 다행히 이런 상황을 대비해 현금 20만 원을 찾아두었지만 6일간의 여정이 암담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날 늦은 오후, 드디어 파리 땅에 발을 디뎠다. 알기 전엔 용감하기라도 했었지 멀고 먼 여정에 온몸이 찌뿌둥하고 뻣뻣해지는 느낌을 알아버린 나는 돌아가는 일정이 벌써부터 걱정됐지만 일단 제쳐두기로 했다. 체감상 파리의 숙박비는 살인적이었고, 그 금액에 상응되는 퀄리티의 숙소도 선택권이 적었기에 첫날은 돈도 아낄 겸 버스 터미널에서 밤을 새기로 마음먹었다. 여하튼 딱딱한 터미널 의자들 중 그나마 구석장이에 편해 보이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꽤 오랜 시간 앉아있었다. 딱 봐도 부랑자처럼 보였는지 아무도 옆에 앉지 않아 오히려 좋다고 생각할 즈음, 한 고상해 보이는 할머니가 옆에 잠시 앉아도 되겠냐 물었다. ‘물론이죠’ 제가 좌석을 산 것도 아닌데.. 를 시작으로 우리의 스몰토크가 시작됐다. 프랑스에 왜 오게 됐는지, 오늘은 어떤 일정인지, 여러 대화를 이어가던 중 할머니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 터미널은 12시에 닫는데??, 어쩌려고 그래? “


지금 생각해 보니 한국 버스터미널도 24시간 운영하지 않지만.. 나 좋을대로 합리화를 해버린게 오산이었다. 마치 태권도 3단의 유단자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함에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할머니는 민망한 듯 어서 숙소를 구해보라며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이 모든 상황을 액땜이겠거니 웃어넘겨야 할지, 내 첫 프랑스 여행은 어떻게 되려나..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나을지, 처음 마주하는 얼토당토않은 상황의 연속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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