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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던 파리여행은

파리에서 파리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기

by 담백


터미널을 나와 눈에 보이는 밤 풍경은 마치 나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현재라고 해야 할까. 다음날 걱정에 앞서 아침을 맞이하기 위한 오늘 저녁이 그야말로 고비였다. 짙은 밤 초점없는 눈으로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길바닥을 누비는 집시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는 옅은 주황색 가로등 빛들도, 눈에 보이는 현실이 믿기지 않아서이지 뒤통수를 맞아 초점이 나간 듯 흐릿해졌다.


"여기서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은데..?" 불현듯 이런 생각이 스쳤다. 길가에서 묻지 마 폭행을 당해 쓰러져있는 나를 누군가 발견해 구급차를 불러주었지만 조금 늦은 골든 타임, 차갑게 식어버린 나의 몸을 실은 앰뷸런스는 병원으로 이송돼 시체 영안실로 이동한다. 여권은 사라져 주머니의 민증으로 신원을 확인하고 부모님께 연락이 닿겠지. 한국까지 이송이 된 나를 본 눈물범벅의 부모님 얼굴까지.(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시뮬레이션이 돌려지자 마음이 차분히 식었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겠지만 조금만 더 정신 차리면 여기 이 찌린내 나는 길바닥은 아닐 거야.


때마침 맥도널드 간판 불빛이 구세주처럼 나를 비췄지만 그마저도 마감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주머니 속엔 단돈 10만 원 남짓, 이 돈으로 하룻밤 지낼 곳을 구해볼 순 있겠지만 앞으로 남은 4일은 거의 우유로 끼니를 때워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마저도 끼니를 때울 수 있다면 다행이다. 앞뒤 사정 가릴 시간이 없었다. 일단 오늘 밤을 넘길 방이 필요했다. 큰 골목을 몇 블록 지나니 터미널 근처라 그래도 꽤 큰 호텔이 보였다. 예상대로 택도 없이 높은 금액을 부르는 직원은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뒤편에 길게 늘어진 앞 호텔의 그림자에 묻히듯 가려진 작은 모텔을 소개해 주었다. 크기에 비해 7만 원이라는 적지 않은 액수를 불렀지만 아득한 밤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낡은 키로 방문을 열고 침대에 앉아 작은 한숨을 내쉬고 이내 골아 떨어졌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에 비해 아침은 부리나케 찾아왔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자는 편이라 꽤나 개운이 자서 상쾌한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개운할 때니.. 오늘 일정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왔다. 손에 남은 3만 원 남짓의 꾸깃한 돈을 세고 또 세봤다. 이미 돌아가는 버스표는 4일 뒤에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다음 날 미셸이 있는 리옹을 가기 위해선 기차를 타야 했는데, 그 기차 스테이션은 내가 있는 곳에서 도보 약 8시간 정도 떨어져 있었고, 그 와중에 숙박비를 아끼겠다고 스테이션 근처에 카우치 서핑(다른 사람의 집에서 무료로 숙박하며, 현지인들은 여행객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소파나 침대를 제공하는 서비스)을 예약했기 때문에 오늘 밤도 무사히 보내기 위해선 8시간을 움직이는 수박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했던 터라 근처 인포메이션센터에서 나눠주는 종이 지도를 펼쳐 들었다. 다행히 꽤나 구석구석 상세하게 그려져있었는데, 무슨 자신감인지 '이 정도면 가볼 만하겠는걸' 생각했다. 사실 이렇게 정신승리하는 것 밖엔 별 수가 없었다.


중간중간 맥도널드를 들러 전기도둑처럼 멀쩡한 콘센트를 찾아 충전기를 꽂고 부모님께 생사를 알리는 일도 잊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이라도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송금받는 편이 나을까 수백 번 고민했지만 어린 맘에 타지에 있는 부모님께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버텼던 것 같다.


내가 쓸 수 있는 도구는 두 가지였다. "봉주르(안녕하세요)", "멬ㅎ씨(감사합니다)" 도구의 수는 적었지만 국수주의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열긴 충분했다. '헬로'라는 단어엔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들의 뾰족한 콧대가 지독하게 얄미우면서도 뭐랄까, '프랑스에 왔으면 프랑스어를 써야지'라는 꼰꼰함이 소신 있어 보여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리의 골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조잡하고 실타래 같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40명이 넘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가며 이동해야 했다. 자기도 가는 길이라며 20분 넘게를 함께 가주는 사람도, 대놓고 무시하던 사람들, 깔깔 웃으며 여기저기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해 주던 여학생 무리들, 참 다양한 사람이 나의 파리 횡단에 녹아들었다.


개선문을 지나 에펠탑이 보일 즈음, 수많은 인파들에 이곳이 관광지구나 싶었지만 큰 감흥이 없었다. 중간쯤 왔으려나, 생각하던 중 커다란 눈에 눈곱이 잔뜩 낀 여학생이 나에게 와 꽃을 건네며 한국인이냐며 이번엔 기부금 리스트까지 들이밀며 사인만 해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어림도 없지. 더군다나 나는 지금 너보다 더 빈털터리 상태라고. "나도 지금 거지야, 돈 없어"라고 하자 예상대로 싸하게 식은 눈빛으로 나를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납득이 되었는지 유유히 사라졌다. 거지가 봐도 거지꼴인 내가 웃기면서도 배가 고파왔다. 하루에 만 원이 내가 쓸 수 있는 전부였다. 슈퍼에서 우유 하나와 빵 하나를 사서 조금씩 나눠서 먹어가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달려가던 건장한 중학생과 부딪히며 그마저도 땅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미안하다며 어느새 사라져 버린 남자의 등짝을 보며 소리칠 힘도 없을 만큼 절망적이었다.


꼬박 8시간이 걸렸다. 카우치 서핑 호스트 뱅상과 만나기로 한 공원에서 이내 다리가 풀려버렸다. 배도 곪은 상태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편하지도 않은 신발로 걸어왔던 길을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났다. 지나가는 프랑스 사람들은 웬 중국인이 상식 없이 벤치에 누워있냐는 따가운 시선을 보냈지만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뱅상은 전 부인과 결혼한 지 3개월 만에 이혼한 흑인 남성이었다. 프랑스에선 혼인신고를 하고 3시간 만에 이혼한 커플도 많다며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 어딘가 이혼에 대한 자부심? 이 느껴졌다. 이외에도 나에게 프랑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하고자 했지만 내 머릿속엔 대체 어쩌자고 흑인 남자 집에 카우치 서핑을 한 건지 온갖 시뮬레이션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후회하긴 이미 늦었고, 더군다나 뱅상의 집 또는 길바닥. 두 가지가 내가 가진 옵션이었다.


뱅상은 한 명의 친구와 집을 공유해서 쓰고 있었다. 선하게 생긴 인상이었지만 두 흑인 남자와 아시안 여자 한 명. 긴장을 풀기엔 조금 무리인 환경이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갑자기 미셸에게 맛 보여주려던 불닭볶음면 두 봉지가 생각났다. 이렇게 매운 게 한국인이라고,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짜로 재워주겠단 사람에게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던 것 같다.)


뱅상과 그의 친구는 흑인들은 매운맛에 강하다며 자부했지만 결국 두 손 두 발 들고 말았다. 불닭의 효과인지 약간 거리감이 느껴지는 듯해서 약간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뱅상의 집을 둘러보니 내가 잘 소파는 보이지 않아 카우치는 어디 있는 거냐고 물어보자, 뱅상은 어깨를 으쓱하며 손가락으로 자신의 침대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옷을 벗고 아무렇지 않게 속옷차림을 보여주는 뱅상. 이게 프랑스인들의 오픈 마인드인가..?


오 마이갓. 살려줘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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