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시 돌아갈래
달렸다. 콧잔등에 스치는 찬바람에 코가 아려올 정도로. 뒤돌아 봤을 때 뱅상이 있던 아파트가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달려왔다고 느껴질때 쯤, 멈춰서 무릎을 집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거리는 한적했고 파리 시내는 그날도 우중충 했다. 불현듯 영국 집이 떠올랐다. 악보다 최악이 있었다는걸 이번 여행을 하며 알게되고 나서야 비로소 그곳이 집처럼 느껴졌다. 돌아가고 싶어도 아직 여행이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거니와 나머지 일정은 미셸과 함께이기에 사실상 무전여행에 가까웠기에 지금 돌아가기엔 왠지 손해보는것 처럼 느껴졌다. (이때라도 돌아갔어야 했다)
또 긴 기다림의 시간이 돌아왔다. 기차역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아직 7시도 되지않는 시간, 어수선한 공기속에 씻지도 않은 몸 구석구석이 찝찝하고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높은 천장을 멍하니 뚫어져라 보기도 하고, 쉴새없이 뛰어다니며 바닥을 나뒹구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어제 잠을 뒤척인 탓인지 그렇게 천천히 흘러가는 시간을 죽이다보니 슬슬 눈이 감겨올때쯤, 누군가 ‘퍽’소리를 내며 내 등을 밀쳤다. 순간 눈이 번뜩 떠져 놀라 뒤를 돌아보니 빨간 뿔테 안경을 낀 귀여운 차림새의 할머니가 악의라곤 담을수 없는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짧은 영어 실력에도 혼신의 손짓,발짓을 더해가며 "뒤에, 누가, 훔치고 있었어요" 라고 말했다. 무기력함에 잠식된 나는 사실 내 가방엔 훔쳐갈 물건도 없었기에, 고맙다며 쓴웃음을 지어 보일 뿐이였다. 요즘 시개에 보기 드문 친절에 미처 진심으로 고마워하지 못해서일까, 지금도 종종 할머니의 눈빛과 바삐움직이던 손짓이 생각난다.
까마득히 길게 느껴졌던 탑승시간이 드디어 다가왔고, 그 어느때보다 푹신하게 느껴졌던 기차의자에 등을 기대고서야 긴장이 풀려 잠에 들었다. 언젠가 유트브에서 나무 망치로 유럽의 모켓 의자시트를 세게 두드리니 나오는 먼지들을 보고 충격을 먹었었는데, 그 뒤로는 그 푹신함이 먼지때문이였을까, 혼자 생각하기도 한다.
창밖에는 몇번이고 명화 작품 속 이삭을 줍는 여자가 있을 것 같은 풍경들이 스쳐 지나가 감상할법도 했지만 잠시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뇌에 전류를 보내서인지 오로지 잠으로 그 시간들을 채웠다.
그렇게 눈 깜짝할 새 도착한 리옹역. 사람이 많진 않았지잔 그 속에 한국인은 나 뿐이여서 인지 두리번 거리며 미첼을 찾는 내가 유난히 덩그러니 느껴졌다. 만나기로한 시간에서 30분이 지나서야 미셸이 보낸 메세지가 하나 도착했다. ‘나 엄마집이 이사를 하게되서, 미안하지만 이번에 우리집에선 못지낼 것 같아. 대신 내 친구 로렐을 보낼거야.‘ 그뒤로 또 읽혀지지도 않는 내 답장만이 이어졌다.
“쥬디?” 익숙치 않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사자머리의 로렐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순간 어느 누구보다 로렐이 하늘에서 온 구세주처럼 느껴져서인지 온몸의 가시가 잦아들고 의심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로렐의 차를 타고 생전 본적도 없는 그녀의 첫 자취방에 가게 됐다. 거기다 프랑스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신축 오피스텔 건물. 게다가 로렐은 처음보는 나에게 친절했다. 소면으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어주고, 프랑스에 오고나서 처음으로 따뜻한 바게트를 입에 넣어준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몸과 마음이 굶주릴때 도와준 사람은 두고두고 생각난다.
로렐 덕분에 나름대로 안정을 찾아갈 때 쯤 또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들어온지 얼마되지않아 아직 와이파이 설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 로렐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엄마께 생존 소식을 전했지만 역시 촉이 좋은 엄마는 살짝 이상한 기류를 감지한 듯 했다.
그날 저녁은 손꼽아 기다리던 뉴이어파티가 있던 날이었기에 엄마께 그간의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라고 했을 게 분명했기에) 몇번이고 내던지고 싶던 까만 시스루 원피스와 돌덩이처럼 느껴졌던 검정 워커를 꺼내신을 생각에 마음은 다시 설레었다. 해가지고 나서야 종적을 감췄던 미셸이 아무일도 없었단 듯 오느라 고생했다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그간을 생각하면 크게 한방이라도 날리고싶었지만 로렐의 친절함을 되새기며 분노를 가라앉혔다. 미셸의 뒤로 금발의 크리샤, 와일드한 레게머리의 안나가 따라들어왔다. 올블랙 가죽자켓을 맞춰입고 각자에게 어쩜그리도 딱 맞는 향수들을 찾아 뿌린 그녀들에게 반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있을까? 그녀들과 함께 누릴 프랑스의 뉴이어 파티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디, 넌 참 쩝쩝거리면서 먹네.“ 처음보는 아시안이여서일지 이것저것 물어보던 친구들 사이로 크리샤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 마음을 파고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코멘트에 ”아, 그런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보였지만 꽤나 쇼크였던지 그 뒤로 저녁을 먹는 내내 한순간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가 끝난지 한참이 지났지만 미셸과 친구들은 그저 각자의 핸드폰만 보며 콧노래를 불렀다. 핸드폰이 없는 나만 눈을 꿈뻑이며 흘러가는 시간을 셀 뿐이였다. 다들 약속이라도 한듯 행동하는 바람에 눈치없는 사람처럼 느껴져 지루하지 않은 척 시간을 죽였지만 결국 이 정적을 깨는 사람은 나일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오늘 가는거지?” 라는 나의 물음에 미셸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며 약간은 코웃음을 쳤다.
“뉴 이어는 내일이야 주디, 12시가 넘으면 우리는 출발할거야. 파티에 먼저 가있는건 못 노는 애들이나 그러는거야” 라며 나를 따끔히 타일렀다. 맙소사, 순식간에 ‘놀아보지도 못한 애’ 가 되며 느껴지는 부끄러움보단 늘 11시 이전에 기절하듯 자버리는 나로선 이미 졸음이 느껴지던 찰나였기에 미셸의 대답이 청천병력처럼 느껴졌다.
11시가 조금 지나자 익숙한듯 일제히 그들은 화장을 시작했다. 기다란 눈썹에 몇번이고 마스카라를 바르고, 분주하게 온몸 구석구석 머리가 지끈해올정도로 빠진 곳 없이 향수를 덧댔다. 청초한 맨얼굴에 이런게 프랑스식 아름다움이구나, 감탄했던 내 마음이 무색하게 그녀들은 한시간만에 걸쳐 엑스트라 버건트(화려한, 약간은 사치스러워 보이는) 마리앙투아네트로 변신했다.
롤라의 작은 차에 5명이 옹기종기 빈틈없이 앉아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그날은 프랑스의 겨울 중에서도 꽤나 추워 입김을 후 하고 내뱉으면 연기가 자욱해지는 날씨였다. 프랑스에서 최신 유행인 노래들을 따라 부르다보니 첫번째 파티장소에 도착했다. 클럽에 들떠서인지 생각보다 졸음도 달아난 듯 했다. 이미 클럽 앞에는 이동네 놀고 싶은 남녀노소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형형색색의 빔이 움직이며 건물을 비추고 있었다. 미셸과 친구들은 직원과 아는사이인지 긴 줄을 스쳐지나 인사를 건네자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도 클럽에 가본적이 없던 나로서는 그저 영화 속에 주인공이 된 기분이였다.
옛 궁전을 개조해 현대화한 장소인지 각 룸별로 다양한 컨셉의 DJ가 자신만의 색으로 공간을 꾸미고 있었다. 20대 뿐만 아니라 그 마을의 주민이 모두 모여 뉴이어를 즐기는 느낌이였고 각자 원하는 컨셉의 방을 골라 즐기면 됐기에 예상외로 자유롭고 정겨운 축제 분위기라 편하게 어울릴 수 있어 좋았다.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 원하는 방을 찾아 그렇게 흐르는 음악에 몸을 맡겨 춤을 추다보니 한 20분 정도 지났을까 지났을까, 미셸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와 ”나가자! 여긴 재미 없어.“ 라고 소리쳤다. “나는 재밌기만 한데!” 라고 하자 더 재밌는데가 있다며 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새로운 클럽은 차를 타고 약 30분을 이동해야됐었는데, 이미 잘 시간이 지나버린 상태에서 모든 에너지를 방전해버린 나는 히터의 따스한 바람에 노곤해져 버린 상태였다. 미셸과 친구들은 이제 흥이 제대로 올랐는지 들떠보였지만 도무지 나는 차에서 한발자국도 뗄 힘이 남아있지않았다. 나에게 클럽은 한번이면 충분했기에 너네만 다녀오라며 차에서 자고있겠다고 했다. 그렇게 몇분이 흘렀을까, 히터가 꺼진 차 안에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됐다 느껴지면서도 잠기운에 몸만 좀 더 웅크릴 뿐이였다. 시스루 원피스의 얇은 구멍들 사이사이로 찬바람이 살갖에 그대로 스치고 지나갔다. 이상태에서 자면 죽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어도 굳게 잠긴 차문을 열고 나갈수도 없는 상황이였다.
아..여기서 이렇게 처량하게 생을 마감하고싶진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