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던 한국으로
내 인생은 그래왔다. 남들보다 한 걸음 늦었고, 나아가는 듯하다가도 뭐가 두려운지 주춤거리곤 했다. 모터 없이도 '순풍'타듯 파도 따라 흘러가는 돛단배보단 가는 길 내내 브레이크만 밟아 기름만 왕창 먹은거에 비해 간 거리는 얼마 되지 않는, 연비 낮은 자동차 같은 느낌이랄까. 가장 모순적인 부분은, 막상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나 돛단배 같은 삶을 대가 없이 주겠다며 기가 막힌 제안을 한다고 해도 머릿속에선 또 지겹도록 몸에 익숙한 현실이 불현듯 그리워진다는 사실이다.
내면의 모순을 마주할 때면 으레 이번 생은 나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 외엔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서글퍼진다. 새로운 일에 적응할 때까지는 온몸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굴다가도 적응하고 나면 어느새 언제 그랬냐는 듯 지루하다고 느껴버리는 나. 그렇게 몸이 편안해지는 것과는 반대로 어느 순간 또 마음속에 일렁이는 불안감에 이상속의 유토피아를 그리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갈팡질팡 허우적거리는 나.
정말 지겹게 느껴지는 건 내 주변 환경이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르겠다.
영국생활이 절반이 넘어갈 때쯤, 또 몹쓸 마음의 병이 도졌다. 병의 증상을 등산으로 빗대자면 이렇다. 산을 막 오르기 시작할 무렵엔 정상을 향해 되지도 않는 체력으로 기를 쓰고 악바리같이 오르다가도 저 멀리 정상이 보이는 듯할 때쯤 다리가 풀려버린다.
다리가 풀리는 시점이 목표를 끝내고 나서라면 정상에서 맘 편히 쉴 수라도 있지,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이 들 때쯤 꼭 다리가 풀린다. 그렇다고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잠시 선선한 바람도 느끼고, 간식도 먹고 다시 출발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내 머릿속의 병은 "난 역시 안 되는 인간이야", "난 틀려먹었어", "난 못해"라고 속삭이며 굳이 돌아갈 수 있는 자책의 늪에 끌고 들어간다. 늪이 얼마나 깊은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주변에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괴로움의 늪을 벗어나고 싶다며 울고불고 허우적 대다가 진이 다 빠져 온몸에 힘이 다 빠질 때쯤이 돼서야 주변이 보인다.
저주라도 풀린 듯 내 시야에서 검은 렌즈가 겆힌다. 다른 알고 보니 ‘늪’이라는 건 내 착각이었을 뿐, 나는 그저 흙탕물에서 살려달라며 발버둥 치고 있었고, 그 덕분에 나를 도와주려는 주변 사람들에게 흙탕물만 잔뜩 튀기고 있을 뿐이었던 것. 정말이지 부끄럽고 미안해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매번 똑같은 사이클을 반복할 걸 알면서도 매번 발을 들여놓는 나 자신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영국에 온 지도 9개월쯤 지났을 무렵부터 증상이 도졌다. 3개월까진 그저 여행온 듯 모든 게 새롭고 신선한 풍경들과 문화에 취해 점점 꿈에 그리던 영국 생활도 현실이 되어 갔다. 집에 돌아오면 쌓여있는 집안일들, 하루 종일 정이 가지 않는 아이를 돌보는 일, 모든 게 지쳐갔다. 6개월까지는 '이 먼 나라까지 아떻게 왔는데, 이렇게 돌아갈 수 없어!'라며 버텨냈고, 그만큼 절박했던 영어실력도 눈에 띄게 늘어갔기 때문에 몇 가지 눈엣가시인 상황들은 큰 타격을 주지 않았다.
딱 3개월 차이인데, 돌아가기 2개월 남짓 남은 9개월 무렵, 그 마음도 어느새 '이만하면 할 만큼 했잖아'라며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작은 자극들에도 화산처럼 폭발해 버리길 반복했다. 먹을 것도 눈치 보며 먹어야 하는 생활, 찬란한 20대의 첫걸음을 남의 애나 봐주며 지나가야 한다는 아까운 시간들에 욕구불만만 쌓여갔다. 이렇게 정신력이 약해져가다 보니 몸도 그에 반응했다. 소화력만은 자부할 수 있었던 나였는데 퍽하면 소화불량에 기하급수적으로 쪄버린 몸무게에 무릎이 쿡쿡, 마음도 쿡쿡 쑤셔오는 듯했다.
더군다나 한국에 절대 돌아가지 않겠단 각오로 왔던 과거의 다짐과는 달리 일 년간 생활하다 보니 영국대학으로 편입을 한다거나 타지에 생활 기반을 다지는 일은 경제적으로든 시간 적으로던 생각보다 장벽이 더 높았고, 그 선택에 대한 기회비용과 예상되는 결과가 내가 한국에 돌아가 다니던 대학을 졸업하는 일 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남과의 비교는 독인 된다는 건 자명한 사실임에도 블랙홀처럼 무의식적으로 빠져들게 될 때가 있다. 사촌언니의 전화가 그랬다. 없는 살림에 유학을 가보겠다고 몇 년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반복하며 고군분투하던 나와 다르게 집안의 지원으로 비행기에 몸만 싫으면 모든 게 해결됐던 언니. 그 전화 이후의 하루하루 내가 하는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지고 길을 잃은 기분에 휩싸였다. 감각이 무뎌지고 새로 하는 일들도 별다를 것 없이 느껴지는 날들의 반복. 그저 한국에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영상통화로 보는 평면이 아닌 싸우더라도 부대껴야지만 느껴지는 가족의 온기가 그리웠다.
어느 순간부터일까, 5년 정도 뒤라면 좀 더 멋져진 나, 원하는 일을 모두 해내고 난 뒤의 삶을 꿈꾸며 현재의 나를 채찍질하기 바빴다. 1년 차이지만 친구들은 모두 전공심화과정과 졸업 후 삶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할 시기였고, 나만이 또 중도에 그만두기를 반복하는 듯 보였다. 열몇 시간을 비행해야 올 수 있는 먼 타지까지 왔으니 뭐라도 얻어가서 보여줘야 한다는 무형의 압박감속에 나를 가뒀다. 영국에서 일 년간 내가 해왔던 것들은 모두 애매한 미완성작들의 결과물처럼 보였고, 또 나만이 제자리걸음, 아니 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 뒷걸음질 치는 것 같아 창피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모두가 나의 앞을 스쳐가고 꼴등이 된 것만 같은 때, 비로소 나를 옥죄는 고삐를 놓을 수 있었다. 함께 살던 이모와 긴 대화를 나누고 한국에 바로 돌아가는 일은 잠시 미루고, 남은 3개월 동안은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결정했다. 그럼에도 집안일은 줄어들지 않았지만.
고삐를 놓는 순간 예전의 게으른 나로 돌아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어 무너질 것 같던 두려움에 비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음의 동요가 잦아들자 조금씩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집 앞 카페 점원의 밝은 인사, 얼굴을 보지 않은지 꽤 되었음에도 꾸준히 편지를 써주던 친구들, 무심코 지나쳤던 차창의 풍경들, 자전거를 끌고 자주 가던 공원의 풀내음, 이 모든 게 내가 가져갈 나의 경험이고 추억이라고 생각하니 공허한 마음이 무언가로 가득 차는 기분이 들었다. 베개를 적시며 잠들기 바빴던 날들이 줄어들고 나를 감싸던 불안이 잠잠해지자 진정 내가 원하는 것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경제적, 시간적 여유의 여부를 떠나서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와 언제든 교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점, 변수 많은 외국에서의 삶보단 안정감을 추구한다는 점 등 많은 요소들이 더 나은 선택권에 대한 비교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30대가 훌쩍 넘어가는 시점에서 최근 주변친구들은 입버릇처럼 ‘아- 고등학생으로 돌아가고 싶어, 너는 안 그래?’ 라며 동조하라는 듯 눈길을 보낸다. 많은 친구들은 시간이 많아 마음껏 상상하고 꿈꾸던 학생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에 비해 (제약이 있는) 자유는 생겼지만 책임이 따르는 어른의 삶이 약간은 버거운 듯하다. 옅은 웃음으로 상황을 잠시 무마시키곤 집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다. 나에게 과거의 삶, 학생시절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불편한 자세로 앉아 주어진 안무를 외워서 분기별로 춰 내가 원하는 호흡으로, 내가 안정감이 느끼는 삶을 선택하고 내가 원하는 가치에 부합하는 목표를 세우고 내가 원하는 속도로 이루어나갈 수 있는 지금, 현재의 일분일초가 더없이 소중해 느껴지는 감각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기록하고 싶다. 되려 오해를 불러 시기와 질투를 살까 봐 친구들에게 직접 얘기하진 못하겠지만 여하튼 내 마음은 그렇다. 제자리걸음을 하더라도, 뒷걸음질 치더라도, 아직까지도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생은 나로서 나답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