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나름대로 여행과 나들이의 기준이 있다. 당일 여행은 왠지 여행이라는 느낌보다 나들이라고 여겨지고 1박이라도 해야 여행으로 다가온다. 내 기억 속의 여행은 여름방학 때마다 해수욕장에 간 것이다. 아빠가 다니던 회사에서 일정 기간 숙소를 대여하면 회사 직원들이 순서를 정하고 각자의 가족을 데려오는 방식이다. 자가용이 흔하지 않던 시절 왕복 버스까지 제공했으니 꽤 괜찮은 복지제도였다. 초등 중등 고등학생 시절에는 수학여행이 대학생 시절에는 엠티라는 여행을 다녔다.
여행을 자유롭게 다닌 건 결혼 후부터 이다. 자차가 있고 외박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결혼 전 아빠는 외박에 엄격했다. 올빼미형 인간인 우리 부부는 새벽 2시에 드라이브를 가기도 하고 가까운 휴양림으로 퇴근길에 떠나곤 했다.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이 더 즐거웠다.
아이가 생기고부터는 여행에 제약이 생겼다. 일단 숙소부터 깔끔해야 했고 이동 거리도 고려해야 했다. 아이가 어린이가 되면서부터는 동물원, 수족관, 민속촌, 어린이박물관 등 아이 위주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쌍둥이 아이를 키우면서 잠자리에 들 때마다 나는 아이들 사이에 누워 아이들을 재웠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여행은 상관없었지만 나 혼자서 나들이라도 갈 경우에는 아이들 잠자는 시간 전에 돌아와야 했다. 결혼 전 외박이 힘들었을 때와 상황이 비슷해졌다.
그러다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시댁 식구 중 성인 여자들만 참여하는 여행이 기획되었다. 오랜만에 아이들 없이 떠나는 여행이라서 설레지만 준비할 게 많았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으레 그렇듯 아이들 식사나 간식, 옷 등 아빠가 있어도 엄마의 손길이 필요한 때였다. 첫 여행이 성공하고 해마다 여행은 반복되었다. 다들 누군가의 엄마이기에 챙길 사람이 없는 여행은 정말 홀가분했다. 하지만 이 여행이 반복될 때마다 나는 누군가가 생각나 가슴 한쪽이 묵직해졌다.
그 사람은 바로 나의 엄마였다. 엄마는 여행을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시어머님과 형님들과 뮤지컬, 연극을 볼 때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경치 좋은 곳을 보면서도 나는 엄마가 계속 생각났다. 엄마가 같이 다니고 싶었다. 애교 없는 딸은 돌아와서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대신 가끔 영화를 같이 보거나 연극을 보자고 할 뿐이다.
요즘에는 그마저도 못한다. 엄마의 허리가 버틸 만큼 버티었는지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극장의 좌석에서도 자동차 의자에서도 오래 앉아있을 수조차 없다. 이제는 경치 좋은 곳을 찾기보다 가까운 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전주에 ‘한국 도로공사 전주수목원’이 있다. 십여 년 만에 방문한 수목원은 정말 달랐다. 예쁜 꽃들이 가득했고 엄마는 오랜만에 많이 걸었다.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가까우니 언제든 올 수 있다고 했지만, 엄마는 나를 앞서 걸었다. 그만큼 엄마는 나들이를 좋아한다. 기분 좋게 나들이한 후 다음날 엄마의 허리와 다리는 많이 아팠다.
얼마 후 추석에는 전주에 있는 ‘대아수목원’을 방문했다. ‘한국 도로공사 전주수목원’을 방문했던 우리는 수목원에 대한 기준은 그곳이었다. ‘대아수목원’은 정말 달랐다. 산세가 훌륭해 눈이 시원해지고 공기도 깨끗했지만 단 하나가 아쉬웠다. 오르막길이 너무 많았다. 아니 모든 길이 오르막이었다. 저질 체력이지만 40대인 나도 힘든데 엄마의 다리는 오죽할까. 지난번 평지를 신나게 걷고 며칠을 고생했던 엄마를 걱정하니 엄마는 오히려 괜찮다면서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다니신다. 그만큼 나들이가 신나시는 건데 너무 속상하다. 내일 아침에도 아니 오늘 밤부터 엄마는 또 아플 것이다.
엄마의 허리와 다리가 오래오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