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송 B

by 림이

성모송

- B



행인들의 몸은 웅크러들고 나뭇가지는 앙상해지는 계절. 차갑지만 시리진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퇴근길의 들뜬 걸음들 사이에서 나는 평소보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생각했다. 이- 즈음의- 공기는– 참— 좋다-.


그리 크지 않은 균열에도 무너질 때가 있다.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하던 때의 나는 그런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한 날이 들이닥칠 때마다 사람의 우울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것인지 짐작해보곤 했다. 시작은 가볍게 주변을 훑는 것에서부터. 방에 덩그러니 앉아 지난 몇일 동안의 일들, 누군가들과 주고받았던 말들을 떠올려본다. 생각이 쏟아진다. 그래서, 그 때, 걔는, 왜? 아니, 그거 말고, 다른 곳에서, 말들, 걔가 그랬대? 그게 뭐 어때서, 내가 잘못했나? 아니 그거 말고 그거, 아, 그 때, 그래 거기서, 아니지 그건 그냥, 그냥, 원래 그런 거야, 그래서 나는 왜?

생각이 방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이에서 건져 올린 단서는 보통 맞는 법이 없다. 질문은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 돌아온다. 평소라면 지나쳤을 눈빛과, 담아두지 않았을 말들에도 왜 어느 순간의 나는 그렇게 상처를 받는지. 알 수 없다. 어쨌든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다.


퇴근길의 로터리는 늘 막힌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늦장을 부렸다. 대책 없는 나를 탓하며 B에게 문자를 남겼다.

ㅡ 가는 중인데 차가 막히네요. 조금만 기다려주시겠어요?

이틀 전, 나는 대뜸 B에게 연락해 함께 성당에 가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내가 B에 대해 아는 건 거의 없었다. 다만 우연히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밥을 먹기 전, B가 오른손을 들어 이마와 가슴 위를 오가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서 그가 천주교인이란 걸 알게 된 정도였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은 B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몇 번 스쳐지나간 얼굴, 딱 그 정도 인연인 나에게서 온 연락이 B는 조금 당황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평소의 나라면, 그러니까 작은 균열 따위 아무렇지 않게 넘길 나였다면 스스로의 다급함보다는 상대방의 당황스러움을 더 신경 썼겠지만 그 때 나는 그럴 여력이 없었다. 이유 모를 우울을 혼자선 다스리기 어려웠고, 그렇다고 매번 주변인들에게 어리광을 피우기엔 뒤돌아서면 그게 또 다시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었던, 그런 때였다.


혼자 가기엔 용기가 안난다며 B를 재촉해놓고서, 막상 걸음과 생각이 느려진 탓은 불안함 때문이었다. 나름의 결심을 하고 가는 성당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 뒤엔 어떡하지. 그 이후엔 나는 무엇을 붙잡아야하지.

10분 늦게 성당에 도착했다. B는 조급한 기색 없이 나를 본당(本堂)으로 안내했다. 처음 가본 성당은 크지만 아늑하고, 수수하게 아름다웠다.


아름다웠다, 고 기억한다. 여기까지 쓰고 수첩을 뒤져보지만 성당에 간 첫 날의 기억과 감정이 어땠는지 어떠한 메모도 남겨놓지 않았다. 한 줄 기록이라도 남겨놓았더라면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종교를, 그 중에서도 성당을 택한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단지 차분하고 고요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 같다고, 그러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고 싶었던 것 같다고 짐작할 뿐이다.


미사라는 이름의 낯선 제례는 마냥 외부인의 태도로 있기에 민망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B를 살피며 드문드문 그를 따라했다.

ㅡ …의 인사를 나누십시오.

신부님의 말이 끝나자 신도들은 손을 합장하고 곁의 사람들과 마주보며 서로 인삿말을 건냈다. 나는 그들이 무엇이라 말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손을 모으고 B를 향해 엉거주춤 고개를 숙였다. B가 나에게 말했다.

ㅡ 평화를 빕니다.

flower.png ⓒateli


ㅡ 림씨가 우는 걸 본 적 있어요. 첫 미사 때, 평화의 인사를 나누는데 눈물이 맺혀있는 걸 봤어요.

언젠가 날을 넘겨가면서 B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은 B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다급한 부탁에 응해줘서, 늘 맘 써줘서 두고두고 고맙다는 말인데 어쩐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이야기를 듣는 B,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한 B, 생각이 많은 B.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B는 다 알고 있을 것 같단 이상한 짐작이 들기도 했다. 그 날도 고맙다는 말 대신 미사를 볼 적에 자주 울음이 터진다는 뜬금없는 고백이 튀어나왔다. 그러고선 괜히 민망해져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가봐요, 하고 웃었다.

ㅡ 난생 처음 미사를 보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슬퍼서 우는 걸까 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집에 가서 어머니한테 말씀 드리니까 ‘그 아가씨, 마음에 성소가 있으신가…’ 하셨어요.

성소(聖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섞인 의문이 왠지 좋았다. 성, 소. 둥글고 나긋한 발음의 단어는 내가 쏟아낸 감정들이 쓸 모 없는 게 아니었다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소란스런 내 맘에도 그런 것이 들어앉을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는 바램이 생기기도 했다.


자신에게 대부모를 부탁하고 싶었다는 나의 말에 B는 웃으며 말했다.

ㅡ 만약 그랬다면 저는 끝까지 거절했을 거에요. 저는 그렇게 좋은 신자가 아니거든요. 림씨 앞에서 성스러운 척 하느라 꽤나 힘들었는걸요.

그러나 B는 이미 나에게 그런 존재이다.


사람의 우울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고, 또 어떻게 사그라드는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순간의 눈빛에서 시작된 것이 다른 눈빛에서 문득 끝날 수도, 별 것 아닌 한 마디에서 시작된 것이 담담한 인사말로 끝날지도. 그러니까 어쩌면, 모든 것은 날씨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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