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에는 마크와의 통화를 마친 후, 창가에서 떠나 침대로 향했다.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재즈 바에서 들었던 마지막 피아노 소절처럼 긴 여운이 맴돌았다. 에티엔의 샤토에서 느낀 화려함과 불편함, 브라이언과 나눈 깊은 대화의 울림, 그리고 마크와 약속한 내일의 저녁 식사. 그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의식 속에서 천천히 층을 이루며 침전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들 때, 클로에는 침대 옆 서랍에서 오래된 가죽 노트를 꺼냈다. 상하이에서 가져온, 할머니가 선물해준 그 노트였다. 한동안 쓰지 않던 종이 위에 손가락을 얹자, 그녀는 이곳이야말로 자신이 가장 편안하게 숨 쉴 수 있는 공간임을 깨달았다. 디지털 회의실의 화면도, 브리핑 자료도, 술잔 너머의 사교적 대화도 아닌, 아무런 필터 없이 오롯이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그려내는 그 자리.
"나는 누구의 언어로 살아가고 있었을까?" 펜을 들고 그녀는 자문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의 목소리로 나를 표현할 것인가?"
저녁이 되자, 클로에는 약속대로 마크와 함께 그 퓨전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익숙한 골목길을 걸으며,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감각으로 주변을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프랑스어와 중국어가 뒤섞인 메뉴판, 동서양의 조리법이 융합된 요리들, 그리고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식당의 분위기—이 모든 것이 이제 그녀에게는 더 이상 이질적이지 않았다.
"이곳은 필립과 자주 왔던 곳인데," 조용한 구석 테이블에 앉으며 클로에가 말했다. "하지만 오늘 밤, 이 공간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져요."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간은 그대로지만, 우리가 그곳에 부여하는 의미는 계속 변하니까요."
그들은 익숙한 메뉴를 새롭게 경험하며 과거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갔다. 마크는 그녀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였고, 클로에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녀의 단어 하나하나가 더 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식사 후, 향긋한 국화차를 마시며 클로에는 마크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 다시 글을 써보려고 해요. 파리에서 만난 사람들, 공간, 대화들... 이 도시에서의 내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니라, 그냥 나답게."
마크의 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는 차잔을 들어 올렸다. "그게 진짜 파리의 모습이죠. 어떤 틀에도 갇히지 않고, 누가 뭐래도 당신만의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것."
밤늦게 아파트로 돌아온 클로에는 책상 앞에 앉아 노트를 펼쳤다. 하루가 피곤하게 흘러갔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또렷했다. 그녀는 잠시 펜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파리의 밤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눈을 돌려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집어들었다. 뉴욕에서의 마지막 전시회에서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 중 한 명은 그녀가 광고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처음 말했을 때, 아무렇지도 않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냥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연결되면 되는 거 아냐? 꼭 브랜드여야 해?"
그 말이 그땐 현실감 없이 들렸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됐다. 꼭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꼭 프로젝트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은 존재했다. 오늘 마크와 나눈 대화처럼, 두 개의 세계 사이에서 다리를 놓는 것. 혹은 지금처럼 고요한 밤에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
창문을 열자 파리의 서늘한 가을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클로에는 그동안 '정체성'이라는 단어를 너무 무겁게 다뤄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누군가의 연인이기도 했고, 직장 동료이기도 했고, 외국인 디자이너이기도 했지만, 그것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는 자신만의 언어, 습관, 관찰력, 감각, 그리고 이야기가 있었다.
페이지 위로 펜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녀는 노트의 첫 장을 열고 조용히 적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내 목소리를 낮추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서 나는, 나의 언어로 말하고, 나의 시선으로 기록하고, 나의 삶을 살 것이다."
그 문장을 쓰고 나자, 클로에의 눈가에 작은 물기가 맺혔다. 이 감정은 승진이나 연애, 누군가의 칭찬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자기 자신으로 온전히 존재했다는 작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창밖으로 파리의 가을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센강을 따라 흐르는 불빛들, 멀리서 들려오는 거리의 소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도시의 호흡. 그 안에서 클로에는 더 이상 경계선 위의 존재가 아닌, 그 경계를 자신만의 무늬로 수놓아가는 사람으로 숨쉬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번역자였다. 여러 세계 사이를 오가며, 그 속에서 자신만의 언어를 창조해내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