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대로 클로에는 주말에 마크와 함께 몽마르트의 아시안 아트 페스티벌에 참석했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오후, 그들은 좁은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새로운 시각으로 동양 미학을 재해석한 작품들을 감상했다.
"이 작가는 중국 서예의 기본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서구 추상화의 요소를 더했네요," 마크가 한 작품 앞에서 설명했다. 그의 손가락이 캔버스의 굵고 얇은 선들을 공중에서 따라갔다. "전통적인 붓 터치지만, 구성은 완전히 현대적이에요."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와 비슷해요.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마크는 살짝 미소지었다. "우리요?"
클로에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한 말에 잠시 당황했지만, 부정하지 않았다. "네, 우리요. 어딘가에 완전히 속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전시장을 돌아다녔다. 전통 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티 바에서 잠시 쉬며, 클로에는 마크에게 상하이에서의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의 가족, 특히 할머니가 가르쳐준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 교육 사이에서 느꼈던 충돌에 대해서도.
"할머니는 제가 외국으로 유학 갈 때 '네 뿌리를 잊지 마라'고 하셨어요," 클로에가 말했다. "그때는 그 말이 구식으로 들렸는데, 지금은 그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아요."
마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비슷해요. 미국에서 공부할 때는 '미국인처럼' 되려고 애썼죠.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달았어요. 내가 누구인지를 부정하면서 어떻게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겠냐고."
해가 저물자, 클로에가 제안한 작은 재즈 바로 향했다. 몽마르트 언덕 아래 숨겨진 이 장소는 관광객들이 잘 모르는 파리 현지인들의 아지트였다. 차분한 음악과 은은한 조명 속에서, 그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다.
"이곳을 어떻게 알게 됐어요?" 마크가 물었다.
클로에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 필립이 데려왔었어요. 하지만 오늘 밤, 이곳은 완전히 다르게 느껴져요."
마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순간 클로에는 필립과 함께였을 때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을 느꼈다.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낸 친밀감이 아닌, 자연스럽게 흐르는 공감대였다.
다음 날, 클로에는 에티엔과의 약속이 있었다. 전날 마크와 보낸 편안한 시간과는 달리, 클로에는 약간의 긴장감을 느꼈다. 에티엔이 제안한 곳은 파리 외곽의 고풍스러운 샤토였다. 특별히 선별된 루이비통의 VIP 고객들과 패션 업계 인사들이 모이는 이벤트였다.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으로 가득한 행사장에 들어서자, 클로에는 자신이 또 다시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베이징 디자이너의 현대적 치파오 스타일 드레스를 입었는데, 그것은 이 자리에서 너무 '이국적'으로 보였다.
"클로에, 오늘 아름답군요," 에티엔이 그녀를 맞이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과 사생활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친밀함이 묻어났다. "그 드레스는 정말 당신다워요.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되고."
"고맙습니다," 클로에가 공손히 답했다. "오늘 중요한 클라이언트들을 만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해요."
에티엔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팔을 잡았다. "당신과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오. 그리고... 단순히 업무적인 관계로만 머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클로에는 순간 망설였다. 에티엔은 매력적이고 성공적인 남자였다. 그와의 관계는 그녀의 커리어에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행사 내내 에티엔은 클로에를 주요 클라이언트들에게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클로에 리우입니다. 우리의 상하이 네트워크를 책임지고 있죠. 아시아 시장의 보석과도 같은 인재예요."
처음에는 에티엔의 호의적인 소개에 감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클로에는 미묘한 불편함을 느꼈다. 에티엔은 그녀의 전문성보다 '아시아적' 배경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고, 때로는 그녀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것인 양 이야기했다.
"중국 밀레니얼 세대의 럭셔리 소비 패턴에 관한 내 분석에 따르면..." 에티엔이 한 클라이언트에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클로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은 분명 지난주 그녀가 제출한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와인 한 잔을 들고 테라스로 나가, 클로에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파리의 밤하늘은 맑았고, 멀리서 에펠탑의 불빛이 반짝였다.
"숨 좀 돌리려고요?"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클로에는 돌아섰다. 미국인 작가 브라이언이었다. 그는 루이비통의 브랜드 스토리텔링 컨설턴트로, 클로에가 몇 번 미팅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네, 조금요. 실내가 답답해서..."
브라이언은 그녀 옆에 서서 함께 야경을 바라보았다. "에티엔이 당신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어요. 하지만 그가 언급하지 않은 것이 있더군요."
"무엇을요?"
"당신이 얼마나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요." 브라이언이 미소지었다. "내가 봤던 당신의 프레젠테이션은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라, 문화적 내러티브를 만들어내는 방식이..."
클로에는 그의 말에 놀랐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이국적' 배경이 아닌, 그녀의 전문성과 통찰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 좀 어떠세요?" 브라이언이 물었다.
클로에는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대답했다. "솔직히... 좀 불편해요. 마치 제가 전시품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우리의 아시아 전문가'라는 소개가 때론 칭찬이 아닌 제한처럼 들릴 때도 있고요."
브라이언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파리는 그런 곳이죠. 외국인을 환영하면서도, 동시에 '다름'을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도시예요. 내가 이곳에 온 지 5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미국인 작가'로 소개되니까요."
그들은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브라이언은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같은 작가들이 파리에서 경험했던 '이방인'으로서의 시간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파리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파리에 완전히 속하지 못했어요. 그 경계에 서 있는 상태가 그들의 작품에 특별한 관점을 제공했죠."
대화를 마치고 실내로 돌아왔을 때, 에티엔이 다가왔다. 그의 표정에는 미묘한 불만이 서려 있었다.
"클로에, 조금 전에 아베 씨를 소개하려고 했는데 찾을 수 없었어요. 일본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언트인데."
"죄송해요, 잠시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서..."
에티엔은 브라이언을 힐끗 보더니 클로에의 팔을 잡았다. "이해해요. 하지만 이런 자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특히 당신처럼 새로운 포지션에 오른 사람에게는요."
그의 말에는 미묘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클로에는 에티엔이 자신의 커리어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필립과는 달리, 에티엔과의 관계에는 권력의 불균형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있는 듯했다.
행사가 끝나고 클로에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마크였다.
"오늘 행사는 어땠어요?" 그의 목소리는 따뜻했다.
클로에는 한숨을 내쉬었다. "화려했죠... 하지만 조금 피곤했어요. 계속해서 '아시아 전문가'로만 소개되는 것이 때론 답답하게 느껴져요."
"이해해요," 마크가 말했다. "타이완 건축가로서 저도 비슷한 경험이 많았으니까요. 우리 작업은 항상 '동양적 감성'이라는 틀로만 해석되곤 하죠."
그들은 한동안 각자의 경험을 나누었다. 마크는 파리 건축계에서 겪은 문화적 편견에 대해 이야기했고, 클로에는 패션 업계의 미묘한 인종차별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일 저녁 시간 있어요?" 클로에가 갑자기 물었다. "제가 발견한 작은 중국-프랑스 퓨전 레스토랑이 있어요. 예전에 필립과 자주 갔던 곳인데, 이제는 그곳을 새롭게 경험하고 싶어요. 당신과 함께요."
마크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묻어났다. "좋아요. 당신이 재발견한 파리를 보고 싶어요."
통화를 마치고, 클로에는 창가에 서서 파리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에티엔과 함께한 화려한 샤토에서의 시간, 브라이언과 나눈 지적인 대화, 그리고 마크와의 편안한 통화. 각기 다른 경험을 통해, 그녀는 파리의 다양한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클로에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누군가의 파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파리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그 여정에서, 그녀는 자신과 같이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그 '다름'에서 오는 독특한 시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파리의 석양이 그녀의 아파트 창문으로 비춰들었다. 클로에는 이제 더 이상 이방인으로서의 파리가 아닌, 자신만의 파리를 만들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경계인' 정체성이 약점이 아닌 특별한 강점임을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