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에 대한 편지, 유희
환절기라는 고비를 맞아 아이가 또 밤새 열이 나고 아팠습니다. 아이의 앓는 소리를 들으며 잠깐 드는 잠은 악몽을 꿀 때보다 더 괴롭기만 합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아이의 이마를 짚고 체온계로 열을 재고 잠든 아이를 흔들어 깨어 해열제를 먹이면 금세 아침이 되어버리지요. 이런 식의 병간호는 아주 양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여러 번 치렀지만 좀처럼 적응은 되지 않습니다. 부디, 아이가 부지런히 감기를 떨쳐내고 씩씩하게 지내주었으면 하는 마음만 가질 뿐입니다.
때때로 이런 일들을 마주할 때마다 몸과 마음이 많이 지치기도 합니다. 우울하기도 하고요. 아마 이 우울의 이유는 제 몫의 시간을 온전히 아이를 위해 내주어야 하는 생활에서 오는 게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제 욕구는 아이를 위해 당연히 눌러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때 밥을 먹고,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화장실을 가고, 아침에 일어나 씻는 것은 어린아이를 키울 때 더없이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 버리니까요. 더욱이 아이가 어린이집을 가기 시작할 무렵 시작된 코로나 팬데믹으로 제 생활은 일주일 내내 같은 싸이클로 돌아갈 뿐이었습니다. 집에서 아이를 먹이고, 씻고, 놀아주며 조금의 시간이 된다면 씻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그런 일과였지요. 물론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 행복한 기억도 많이 만들었지만 다시 그 시기로 돌아가자고 하면 꽤 괴로울 것 같습니다.
그 시기를 지나고 나니, 아이도 훌쩍 자랐고 저도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집에 있던 시간이 워낙 길어서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렇게 나이가 먹은 것 같습니다. 엄마로서는 성장했지만 사회인으로서는 퇴행하면서 말입니다.
이경 씨에게 말한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아이가 생기기 전, 제가 스물아홉이 되던 해 저는 배 속에 품고 있던 아이를 잃은 적이 있습니다. 태명까지 지어 놓은 아이가 완전히 제 뱃속에서 자리도 잡지 못하고 떠났고 울고 절망하면서 새해를 맞이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를 키우며 잘 생각나지 않는 상처로 남았지만 그때는 스물아홉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한 해를 시작하며 소중한 것을 잃었으니 시작한 한 해가 어서 끝나버리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마치 누군가 각본이라도 짜 놓은 듯 운전 중 교통사고가 일어났고, 그 사고로 허리를 다쳐 오랫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해에 몇 번의 불행한 일이 몇 번 더 몰려서 왔고요.
그때는 그 모든 어둠의 기운이 스물아홉이라는 숫자에 담긴 불길한 기운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에 있어서 안 좋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고 어떻게든 굽이굽이 지나와 지금의 제가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언제나 어디서든 얼굴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나이를 먹고 다시 서른아홉, 마흔아홉 그 이후까지 수많은 아홉수를 맞이하게 되겠지요.
요즘 제가 느끼는 이 기분도 어쨌든 지나가는 감정의 하나일 뿐 일 겁니다. 늪에 빠진 것 같아 허우적거리고 있긴 하지만 늪 밖으로 나가면 살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습니다. 조금 오래 가지고 있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동안 그래왔듯 잘 지나가 보겠습니다. 언젠가 이경 씨가 말했듯 저는 늘 행복한 결말을 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니까요.
뜬금없지만 이경 씨는 최근에 울어본 적이 있으신가요? 이상하게 서른 중반을 넘어가니 쉽사리 눈물이 잘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훔치는 일이 있지만 제 일에 울어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감정인데 제 감정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감정을 붙잡고 울어야 하는지 까먹은 것도 같고요.
이 울음이 잘 터지지 않아 계속 이 답답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 되기가 참 힘이 듭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울기 힘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스물아홉, 뱃속의 작은 아이를 잃고 꺼이꺼이 소리를 내어 울었던 날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엄마’라는 단어를 하루에 수백 번은 부르며 저를 찾는 지금의 제 아이가 소중하고 또 소중합니다. 버겁고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지만 모든 게 아이의 탓이 아닌 제 마음의 탓일 겁니다.
이런 와중에 내가 지금 글을 쓰고 있다는 것. 음성이 아닌 활자로 된 이 구질구질하고 우울한 이야기를 들어줄 한 사람의 독자가 있다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불이 꺼진 커다란 집 안에서 이경 씨와 환한 촛불 하나를 켜 놓고 있는 기분입니다.
요즘은 아이와 함께 포켓몬스터를 보고 있습니다. 이경 씨도 당연히 알고 있는 애니메이션이겠지요? 캐릭터 중 마자용이라는 캐릭터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마자용은 뒤에 꼬리를 숨겨 두고 샌디백처럼 생긴 가짜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캐릭터입니다. 진짜 몸은 가짜 몸 뒤에 숨겨 두고요. 대체로 인생이라는 불안한 여정에 자주 얻어맞는 입장이지만 저의 물러터진 마음은 마자용의 꼬리처럼 잘 숨겨 두고 있어야겠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잘해보겠습니다. 모쪼록 이번 편지도 이경 씨에게 잘 전해지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