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사물: 소재>
설원은 아무도 열지 않은
봉인의 종이
걸으면 각설탕이
으스러지는 소리
발끝에서 튄 가루가
입가에도 닿는다
씹히는 건 추위의 질감
백지는 새로 깎인 나무 냄새여서
한 장만 펴도 폐 깊숙이
하얀 톱밥이 들어오는 것 같다
들숨이 글보다 먼저 형태를 갖춘다
숨에 톱밥 가루가 잘게 걸리고
감각만 먼저 안쪽을 채운다
손에 익은 펜들은
거기서 잠깐 살고
곧 살점을 잃는다
모서리에 남은 흰 눌림이
오래 눌렀던 시간을 대신한다
한 번 지나간 생각을
다시 밟지 않으려
발을 옆으로 두었다가
또
몇 걸음 물러선다
흰 빛이 남겨둔 획을 눌러 없앤다
뒷걸음친 자리에서
겨우
앞이 생긴다
*palimpsest. 중세 시대에 기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쓴 양피지를 가리킴.
해아래 새것이 없다.
그 말, 의심하다 제 풀에 꺾인다.
싱크대 위엔 설탕 가루가 떨어져 있거나, 물자국이 남아 있다.
사소한 것들의 자국은 늘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무늬로 반복된다.
새로운 생각은 멀리서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꾸 먼 데를 본다.
번쩍이는 것들이 새것이라 착각하는 내 눈은 쉽게 속는다.
새것이 없다는 말.
세상은 매일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내가 새롭게 보지 못할 뿐.
오늘도 보기를 길들인다. 관찰을 연습한다.
글벗 되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날, 새로운 나를 데리고 힘찬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진.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