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림프세스트*

<시적 사물: 소재>

by 모카레몬
팔림프세스트.jpg



설원은 아무도 열지 않은

봉인의 종이


걸으면 각설탕이

으스러지는 소리

발끝에서 튄 가루가

입가에도 닿는다


씹히는 건 추위의 질감


백지는 새로 깎인 나무 냄새여서

한 장만 펴도 폐 깊숙이

하얀 톱밥이 들어오는 것 같다


들숨이 글보다 먼저 형태를 갖춘다

숨에 톱밥 가루가 잘게 걸리고

감각만 먼저 안쪽을 채운다


손에 익은 펜들은

거기서 잠깐 살고

곧 살점을 잃는다


모서리에 남은 흰 눌림이

오래 눌렀던 시간을 대신한다


한 번 지나간 생각을

다시 밟지 않으려

발을 옆으로 두었다가

몇 걸음 물러선다


흰 빛이 남겨둔 획을 눌러 없앤다


뒷걸음친 자리에서

겨우

앞이 생긴다





*palimpsest. 중세 시대에 기존 글을 지우고 그 위에 새로운 글을 쓴 양피지를 가리킴.



해아래 새것이 없다.

그 말, 의심하다 제 풀에 꺾인다.

싱크대 위엔 설탕 가루가 떨어져 있거나, 물자국이 남아 있다.

사소한 것들의 자국은 늘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무늬로 반복된다.

새로운 생각은 멀리서 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자꾸 먼 데를 본다.

번쩍이는 것들이 새것이라 착각하는 내 눈은 쉽게 속는다.


새것이 없다는 말.

세상은 매일 새로워지는 게 아니라, 내가 새롭게 보지 못할 뿐.

오늘도 보기를 길들인다. 관찰을 연습한다.



글벗 되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로운 날, 새로운 나를 데리고 힘찬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사진. pixabay.

월, 목 연재
이전 05화소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