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by 두밧두중독현상

어린 시절에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엄마는 늘 동생 때문에, 아빠는 회사일 때문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바로 책 읽기와 재밌는 상상하기. 하교시간에 집 가기 귀찮을 때는 집까지 순간이동하는 상상을 했고, 언덕길을 오르기 힘들 때는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견뎠다. 그리고 해리포터를 읽을 때에는 마법학교인 호그와트로 갈 수 있는 9와 4분의 3 승강장을 떠올리며 나를 마법세계로 데려다주길 꿈꿨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상상을 하지 않게 되었다. mbti가 N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나는 현실에 찌든 평범한 어른이 되어버렸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는 지겹다는 말을 달고 살며 어떤 날은 회사 가기가 너무 싫어서 도착역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운 적도 있다. 맑고 초롱초롱하던 눈은 빛을 잃고, 동태눈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리포터에 나오는 9와 4분의 3 승강장처럼 즐겁고 기대되는 일이 많았던 순수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만드는 이들이 나타났다. 바로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아이돌 그룹이다.


입덕의 시작은 단순했다. 때는 ’ 24년 하반기, 유튜브 알고리즘에 “남자아이돌 숭한 춤”이라는 숏폼이 떠서 호기심에 클릭했다. 그때 연준을 처음 봤다. 연준의 첫 솔로 믹스테이프 GGUM이었는데 그때는 그에게 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숭하다는 거지? 까리하기만 한데’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간간히 그가 생각이 나 그의 본무대를 보기 시작했다. 무대를 볼 때마다 ‘이 녀석 꽤 멋진데?’라고 생각하며 댓글을 봤는데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그룹의 멤버란다. 그때까지만 해도 투모로우바이투게더는 낯선 그룹이었다. 19년에 입직한 나와 같은 연도에 데뷔한 아이돌임에도 나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연준은 잊히는 듯했으나 이상하게 가끔씩 생각이 났다.


2025년이 되었다. 취업 준비를 할 때 면접스터디를 같이 했던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투모로우바이투게더에 관한 걸 올려놓은 것을 봤다. 그 친구에게 나도 GGUM 영상을 봤다고 말하며 ‘멋지더라’ 한 마디 해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에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다른 멤버인 휴닝카이의 베텔기우스 영상이 알고리즘에 나타났다. 일본에서 일본 아이돌과 함께 듀엣으로 유우리의 베텔기우스를 부른 영상이었는데 휴닝카이가 압도적으로 잘해서 일본에서도 “왜 일본어로 지고 있는 거야” 같은 웃기는 댓글이 떠돌아다닐 정도였다. ‘휴닝카이? 이름 이상한데 노래 진짜 잘하긴 한다 얘도 투모로우바이투게더네’ 이것이 휴닝카이에 대한 감상이었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멤버 중 두 명의 영상을 본 영향일까 이번에는 알고리즘이 리더인 수빈이 라디오스타에 나온 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수박 빨리 먹는 개인기를 하는데 MC들조차 아이돌이, 투바투가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할 정도로 7년 차 그룹 답지 않게 신인처럼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수빈은 텔레비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오고 싶어서 무리했다고 말했다. 이때부터였다. 투모로우바이투게더라는 그룹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게 된 계기가.


본격적으로 무대영상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의 팬이 된 것이다. 그러던 중 면접스터디 친구가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콘서트에 다녀온 것을 스토리에 올렸다. 그녀에게 연락했다. 나도 쟤네 좋아하게 되었다고.


건조한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더 이상 출근길에 울지 않는다. 내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면서 출근하기에. 그들의 얘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게 활기가 솟아 목소리가 커진다. 점심시간에 친구와 그들에 대해 실컷 얘기하고 자리로 복귀한 날 렌즈를 끼지 않았음에도 팀원에게 렌즈 꼈냐는 말을 들었다. 평소와 다르게 눈이 유난히 반짝였나 보다.

그들을 좋아한 이후로 하루하루 마법세계에서 사는 것 같다. 머글이던 시절이 까마득하다. 마법사가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이게 다 9와 4분의 3 승강장을 통과한 덕분이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9와 4분의 3 승강장이 있어 하루하루 버틸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혹시 지금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기다릴 테니 함께 도망가도 좋다.


물론 나에게 그 승강장은 투모로우바이투게더겠지만.



그럴 땐 눈물이 날 땐

내 손을 꽉 잡아 도망갈까

숨겨진 9와 4분의 3엔 함께여야 갈 수 있어

비비디 바비디 열차가 출발하네 (oh, oh, oh)

비비디 바비디 우리의 매직 아일랜드 (oh, oh, oh)

이 터널을 지나면 (hey) 눈을 뜨고 나면 (hey)

꿈속은 현실이 돼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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