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영신학, 초대형 교회, 정치적 로비.
신약을 보면 예수는 성전 뜰에서 상인들이 장사하려고 벌여놓은 좌판을 뒤엎었다. 그 장면은 단순한 분노의 폭발이 아니라, 종교의 자본화가 신앙의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예언적 상징 행위였다. 그러나 21세기 기독교의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예수가 성전에서 몰아냈던 “비둘기 파는 자들”이, 이제는 성전의 중심 자리에 앉아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더 이상 ‘구원’을 팔지 않는다. 대신 ‘성공’을 판다. 그것도 감히 신의 이름으로 말이다. 근대 이후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체제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 윤리, 그리고 종교적 체험의 구조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안에서 교회는 종종 비판자가 아니라 협력자가 되었고, 예언자의 목소리 대신 시장의 논리를 설교했다. 이렇게 현대 기독교 교회가 자본주의와 결탁하여 변질되고 신학이 “상품화된 신앙”으로 전락했다.
이른바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20세기 중엽 미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 등장한 사상으로, 간단히 요약하면 “신은 당신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없고 예수가 철저히 배격한 부(富)를 감히 교회의 이름으로 더 나아가 신앙의 이름으로 축복한 것이다. 곧 믿음을 가진 자에게 건강, 부, 성공이 주어지며, 가난은 믿음 부족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은 ‘축복’을 물질적 풍요로 등치 시킴으로써, 성서가 경고한 ‘재물의 신 마몬'(Mammon)을 교회의 중심에 앉혔다. 그 반대로 병들고 가난하고 실패한 자는 믿음이 부족한 때문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논리적 모순을 만들어 냈다. 예수는 건강한 자, 부자, 성공한 자가 아닌 가난한 자, 실패한 자, 병든 자를 특별히 더 사랑했다는 것이 성경에 엄연히 나와 있는데 이 번영신학은 그런 진리에 눈을 감아 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뒤집어 버렸다.
이 번영 신학의 기저에는 근대 자본주의의 ‘성과 중심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곧 믿음은 일종의 투자 행위이고, 헌금은 신적 보상 메커니즘에 대한 계약금이 된다. 이런 구조 속에서 ‘신’은 더 이상 초월적 인격이 아니라, 일종의 ‘우주적 자동판매기’로 전락한다. 헌금이라는 동전을 넣으면, 성공이라는 상품이 나오는 시스템이다. 현대 기독교 교회의 번영신학은 신앙을 시장의 언어로 번역했다. 곧 “기도는 투자다”, “헌금은 씨앗이다”, “신은 복을 약속하셨다”라는 허무맹랑한 구호를 남발한 것이다. 이 모든 구호는 경제적 언어로 재해석된 신앙의 코드다. 설교자는 더 이상 죄와 회개의 문제를 다루지 않고, 그저 ‘성공하는 법’을 가르치는 인생 코치가 되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복음이 아니라 자기 계발서의 변형판이며, 성서 본문은 그럴듯한 근거로서 동원된다. 이런 신학은 신앙의 방향을 ‘하늘’이 아니라 ‘시장’으로 돌려놓았다. “십자가의 복음”은 사라지고, 대신 “축복의 공식”이 자리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순복음교회의 이른바 ‘오중 복음 삼중 축복’의 공식이 대 성공을 거두자 너도나도 그 공식을 따라 하기 바쁜 나라가 된 것이다. 결국 교회는 사람들을 구원으로 부르지 않고, ‘성공 클럽’으로 끌어들인다. 목회자는 예언자가 아니라, 브랜드 매니저가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탄생된 것이 메가 처치, 곧 초대형교회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