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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 금욕 강요의 이중성

독신제의 역사적 기원과 부작용

by Francis Lee

기독교의 역사에서 ‘금욕’은 단순한 덕목을 넘어, 신에게 헌신하는 자의 표징으로 신성시되어 왔다. 그러나 이 ‘금욕’의 개념이 언제, 어떤 맥락에서 ‘성직자의 필수 조건’으로 제도화되었는지를 추적하면, 그 과정은 신학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오늘날과 같은 독신제(celebratio caelibatus)를 요구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결혼하지 않은 것이 더 좋다”라고 말하면서도, “정욕이 불타는 자는 결혼하라”라고 권고하였다(고전 7:9). 즉, 그는 금욕을 선택의 문제로 보았지, 의무로 보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 다수가 결혼한 평범한 남성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베드로에게 장모가 있었다는 복음서의 기술은, ‘결혼한 사도’라는 사실이 초기 교회에서는 아무런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4세기에 들어,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고 국가 종교로 삼으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성직자 집단이 점차 사회적 특권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영적 순결’이라는 개념이 교회의 도덕적 권위와 사회적 우월성을 상징하는 표식으로 변모했다. 성의 절제가 곧 권력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언어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성직자의 금욕은 더 이상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교회 제도의 자기 보존 장치가 되었다. 라테란 공의회(1123, 1139)는 마침내 모든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령을 공표한다. 이 조치는 신학적 성찰의 결과라기보다, 교회의 재산이 사제의 가족을 통해 세습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행정적 조치였다. 즉, 독신제는 ‘영적 순결’의 요구가 아니라, 교회 재산을 통제하기 위한 제도적 장벽으로 도입된 셈이다. 결국 “성스러움”은 “소유권의 문제”로 전락했다. 교회의 금욕은 하늘의 명령이 아니라, 지상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법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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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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