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신의 이름으로 분노하지 않는 신앙의 필요성
기독교 교회의 역사는 신의 이름으로 분노한 인간들의 피로 얼룩져 왔다. 예수의 이름으로 수립된 공동체에서 기원을 찾는 기독교 교회는 예수가 설파한 사랑과 구원의 이름으로 출발했으나, 그 내부에서조차 분노는 신학적 언어로 정당화되었고, 폭력은 “정의의 심판”으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적 분노의 윤리’는 명백히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신의 이름으로 분노하지 않는 신앙’, 곧 연민과 책임의 윤리로서의 신앙을 재구성해야만 한다. 이는 교회 자체의 sein, 곧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sollen, 곧 당위이다. 이는 단순히 제도 개혁을 뜻하지 않고 신앙의 인식론 자체, 즉 신을 아는 방식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신적 분노’는 두 가지 얼굴을 가졌다. 하나는 악에 대한 의로운 심판으로서의 분노이며, 다른 하나는 교권적 폭력의 신학적 정당화로서의 분노였다. 전자는 예언자적 저항의 언어로, 후자는 체제 유지를 위한 억압의 언어로 기능했다. 그런데 교회는 후자의 길을 택함으로써 스스로를 심판의 주체로 내세웠다. 원래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심판의 주인은 신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그런 신의 심판은 인간의 제도 안으로 흡수되었고, ‘교회의 분노’는 신의 분노를 대리하는 것으로 합리화되었다.
이때 분노는 신학적 정념이 아니라 권력의 장치가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 없는 정의는 폭력이며, 정의 없는 사랑은 방종이다”라고 했을 때, 과연 그는 교회 자체가 그런 폭력과 방종의 주체가 될 것을 알았을까? 중세 이후 교회는 ‘사랑 없는 정의’, 곧 도덕적 분노를 내세운 폭력의 체계를 구축했다. 이 신학적 분노는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교회에 대항하는 세력을 악마화 한 종교재판, 여성과 소수자를 악으로 몰아간 마녀사냥, 성지 회복을 명분으로 교회의 탐욕을 위장하여 많은 희생을 야기한 십자군, 토착 문화와 주민을 이단으로 몰아 강제 개종과 살육을 정당화 한 식민 선교, 그리고 현대의 성경무오설과 축자주의를 근거고 세속 사회를 적으로 간주한 근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형태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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