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 시대정신에 반하는 기독교의 배타성과 혐오의 긴 역사
칠죄종의 여섯 번째 죄목인 시기(Invidia)는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 결핍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타종교를 대하는 방식에 깊숙이 스며 있었던 정동 구조였다. 시기는 단순히 “남이 가진 것을 탐내는 마음”이 아니라, 타자가 가진 진리, 영향력, 생명력, 문화적 매력을 부러워하는 차원을 넘어 궁극적으로 위협으로 느끼고 그것을 파괴하고자 하는 심리적 충동이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시기적 역동을 타종교에 대해 반복적으로 수행해 왔다. 교부 시대에는 그리스 철학에 대한 경계와 모방이 동시에 나타났고, 중세에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공포와 존경이 뒤엉켰으며, 근대 이후에는 유대교, 이슬람, 힌두교, 불교, 민족종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에 대해 복잡한 시기에서 나오는 경쟁을 펼쳤다.
개신교조차 “종교개혁의 자유주의적 정신”을 잃어버린 뒤, 가톨릭과 동일하거나 더 공격적인 타종교 배타성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매우 유가미 아닐 수 없다. 종교개혁 이후 서유럽은 신앙의 다양화가 가능해진 듯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루터와 칼뱅이 로마 교회의 권위주의적 배타성을 비판했음에도, 개신교는 곧 또 다른 형태의 ‘진리 독점 주체’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어느 모로는 가톨릭보다 더 극단적인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보였다. 이는 종교개혁이 “로마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신학”이었지, “타종교와 공존하기 위한 신학”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근대 이후 탄생한 많은 신생 기독교 교파들은 서로 싸우며 생존 자체에 골몰하다 보니 내부 분열에서 버티기 위해 자체 교리를 강화하고 결국 외부에 대한 배타성이 강화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되었다. 더구나 세속화가 가속화되면서 사회와 개인에 대한 기독교의 영향력 감소 되어 입지가 좁아지자 타종교와 사상에 대한 공격성이 더욱 증폭되어 버렸다. 여기에 더해 자연과학이 발달하면서 교회가 내세우는 교회의 논리적 설득력이 줄어들자 오히려 성경 해석과 교리에서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더욱 빠지게 되었다. 이 과정은 새로운 형태의 보다 근본적인 시기를 야기했다. 곧 기독교는 단지 “이슬람, 유대교, 불교”와 같은 종교와만 경쟁한 것이 아니라, 철학, 과학, 예술, 심리학, 영성 운동들을 포함한 모든 비기독교적 담론과 경쟁하는 가운데 과학적인 설득력에서 더 열등한 지위에 놓이게 되어 분노와 시기의 감정에 빠ᆞ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19세기 복음주의는 침략적 선교를 정당화했고, 20세기 근본주의는 다원주의 시대에서도 여전히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는 폐쇄적 감정 구조를 강화했다. 이는 기독교 스스로 사회적 고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는 ‘개독교’로 불릴 정도로 조롱거리가 되면서 기독교의 분노와 시기는 더욱 증폭된 것이다.
사실 19세기 이후 동양 종교는 서구 지성인들에게 하나의 대안적 영성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불교는 그 합리성, 명상의 전통, 비폭력성, 초월적 신, 특히 유일신 개념의 부재로 기독교의 너무 거창하고 복잡한 교리 체계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때 기독교는 두 가지 반응을 보였다. 먼저 불교의 폄하와 악마화 전략을 택했다. 불교는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신을 무시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죄인인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구원에 의존하는 교만한 종교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도교는 힌두교가 미신적이고 ‘미개한’ 다신교라고 비난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유교는 초월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이 그저 현실 사회에 대한 도덕주의적 공리주의에 빠져 궁극적 구원을 모르는 사상 체계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도교는 그저 비과학적 신비주의일 뿐이라고 폄하하였다. 이렇게 서구 선교사들은 아시아 종교들을 철저히 하위문화로 규정했으며, 이 과정에서 상대 종교에 대한 깊은 이해가 철저히 결여된 상태에서 경멸적 문화적 우월주의만을 내세웠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기독교 내부에서는 명상, 영성 훈련, 자연친화적 세계관과 같은 동양 종교의 특징을 흡수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문제는 이러한 수용이 ‘공존’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우월성 회복을 위한 경쟁적 흡수였다는 점이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상대방이 지닌 장점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가톨릭의 “관상기도(contemplation) 운동, 개신교의 영성 훈련(spiritual discipline), 특히 젊은 층을 겨냥한 기독교 명상 프로그램과 같은 것은 결국 동양적 영성의 매력을 무시할 수 없다는 기독교의 무의식적 시기를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이런 모순적 태도는 단순한 신학적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화적, 심리적인 차원의 복합적인 역학 관계의 산물로서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기독교는 종종 자신이 비판했던 로마 제국의 배타성과 지배 욕망을 그대로 재현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이 세상의 빛인 예수의 대리자라고 선포했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로마의 엄청난 수준의 철학 전통 앞에서 두려움과 매혹을 동시에 느꼈다. 사실 그리스 철학은 기독교 교리에 논리와 체계를 제공했다. 이에 맞서 기독교는 영감과 계시를 내세웠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지적 위상은 당시 기독교가 도저히 경쟁할 수 없는 것이었고, 이 열등감은 신학적 공격성으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터툴리아누스는 “아테네가 예루살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나 정작 기독교는 그 교리를 정교화하는 과정에서 플라톤주의와 스토아학파의 사상에서 나온 개념을 대거 차용했다. 이것이야 말로 그리스 고전 철학에 대한 종교적 콤플렉스, 즉 시기의 전형적 형태였다.
그런데 기독교의 가장 깊고 오래된 종교적 시기는 사실 유대교를 향한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경전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구약>이라 지칭하며 자기만의 논리로 세운 신학으로 그 내용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해 버렸다. 그러면서 충실한 유대교 신자였던 유대인 예수를 통해 자신들이 이른바 ‘참된’ 이스라엘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유대교는 자기 신앙의 본래 모습을 디아스포라 시기에도 그대로 유지했다. 기독교가 유대교를 ‘대체’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는 유대교 없이는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었다.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약은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시기에 눈이 먼 일부 신학자가 구약을 없애버리자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무지의 소치였을 뿐이다. 종교학적으로 볼 때 예수는 결코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 유대교 개혁가였을 뿐이다. 이 불편한 관계는 시기라는 복합적인 감정 구조를 만들었다. 기독교의 정체성은 유대교를 필연적으로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유대교가 기독교의 등장으로 무너지지 않고 완결된 종교로 지속된 것에 대해 깊은 시기를 느끼게 된 것이다.
기독교 목사들이 설교할 때 <구약>에 나오는 유대 문학과 철학, 그리고 영성을 뛰어넘을 수가 없고 해석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가 잠시 박해를 받았다고 선전하지만 유대교는 2천 년 넘도록 생존한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통해 그 종교정 정체성과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런 요소는 기독교의 이른바 신정론적 우월성의 근간을 흔드는 요인이었다. 그래서 일부 기독교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가 버텨낸 것을 영적 오만으로 규정하며 적대감을 보이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독교가 유대교를 적대시해도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의 뿌리는 유대교이고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는 유대교의 ‘사생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자신이 가진 열등감과 정당성 부족을 보완하기 위해 유대교 폄하에 총력을 기울였다. 먼저 내세운 것이 ‘유대인들이 참 메시아인 예수를 거부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구세주인 예수를 살해했다’는 서사다. 기독교는 이 주장을 수천 년 동안 되풀이 해왔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유대교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모양새를 보였지만 여전히 불편한 내심은 버리지 못하고 이다. 여기에 더해 기독교는 유대인의 역사적 고난을 신의 심판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신인 야훼에 대한 유대인들의 믿음과 생존력은 유대인의 역사가 신의 심판으로 끝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이를 기독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존속 자체가 기독교의 생존에 대한 위험 요소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시기의 감정은 기독교가 국교가 되기 전부터 유대교와 유대인에 대한 박해의 긴 역사를 만들어 냈다. 히틀러 이전에도 유럽에서는 유대인과 유대교는 끊임없는 박해의 대상이었다.
기독교의 이슬람에 대한 태도는 시기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존경심이 섞인 복합적인 것이었다. 사실 중세 유럽에서 이슬람은 단지 경쟁 종교만이 아니라 유럽이 결코 이겨보지 못한 거대한 문명이었다. 그 당시 이슬람은 성지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더 나나가 지중해 권역을 제패한 엄청난 세력이었다. 그리고 당시 이슬함의 철학, 과학, 의학의 수준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을 훨씬 능가했다. 동서 무역 통제로 경제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여기에 더해 강력한 이슬람교는 이 이슬람 권역의 공동체성과 통합성을 이루는 정신적 힘이 되었다. 이런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그저 시기에서 나오는 공격성이었다. 거룩한 도시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시작한 십자군 전쟁의 심리에는 이슬람 문명에 대한 열등감이 숨어 있었다. 기독교가 국교인 유럽 내부의 분열을 외부 전쟁으로 전환하려는 욕망도 있었다. 종교적 신념보다는 교황권의 정치적 헤게모니 확대가 더 중요한 요소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베로나니(이븐 루시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에 의존했다. 그럼에도 기독교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슬람은 이단이며 미혹”이라고 선언했다. 이런 이율배반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모습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슬람이 더 강하다는 사실에서 두려움을 느꼈고, 이슬람의 탁월한 지적, 문화적 수준에 대해 시기심을 느꼈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슬람보다 기독교와 기독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망이 폭력성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 복합적 감정 모델이 십자군 전쟁과 레콩키스타 전쟁, 그리고 더 나아가 같은 기독교이지만 동방의 정교회와 오스만 제국과의 갈등을 야기한 것이다.
그런데 중세가 지나고 나서 근대가 들어서자 기독교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의 구조는 오히려 더욱 심화되었다. 그래서 근대의 시대정신인 종교다원주의에 맞서 강화된 기독교 배타성은 정치적 제국주의와 결탁하여 더욱 폭력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결탁된 식민주의와 선교는 기독교의 경쟁심을 ‘문명’과 ‘개화’를 명분으로 제도화해 버렸다. 또한 유럽의 정치세력이 주도한 제국주의는 기독교 선교를 식민지에 대한 군사, 경제, 정치적 정복과 지배의 도구로 이용했다.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을 착취하고 학살하면서도 선교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아프리카에서는 비인도적인 노예무역을 합리화하는데 기독교를 내세웠다. 아시아에서는 ‘매개한’ 아시아인의 ‘계몽’을 위한 교육, 의료 시혜를 명분으로 아시아 고유의 문화 파괴에 기독교를 내세웠다. 그러나 사실 이때 사용된 논리 대부분은 종교적 시기에서 출발했다. 기독교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의 문명과 종교는 수준이 낮고 미신적인 것이라고 폄하했다. 그렇게 상대방을 깔보아야 자신이 돋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독교는 다른 지역에는 아예 예수 그리스도가 가르친 ‘진리’가 없다고 단언했다. 그래서 이들의 문화와 종교는 열등하기에 기독교의 종교와 문명으로 ‘대체’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래서 선교가 아니라 개종에 열을 올린 것이다. 사실 이러한 담론은 단순한 선교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의 ‘영적 시장 경쟁’이었다. 문명 충돌의 이념 뒤에는 늘 이렇게 종교적 시기와 제국의 정치적 욕망이 결합한 구조가 자리하고 있는 법이다.
문제는 이성과 고학이 시대정신이 된 20세기 이후에도 기독교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개신교에서 등장한 근본주의는 다원주의 시대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기독교의 신학적 질투를 잘 보여주고 있다. 20세기부터 더욱 강화된 과학주의, 인문주의, 비교종교학적 관점, 동양 종교의 부상, 그리고 무엇보다 세속화는 유럽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내전만을 거듭해 온 기독교의 지적, 문화적 독점권을 약화시키자,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방어기제로 근본주의 신학을 구축했다. 근본주의는 배타적인 주장으로 타종교를 폄하했다. 성경은 절대로 오류가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이며, 예수만이 모든 인류의 유일한 구원자이고,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악마적인 속임수라고 주장한 것이다. 사실 이는 단순한 기독교 교리의 극보수화가 아니라, 타종교에 대한 존재론적 시기에서 나온 주장일 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불교의 명상 전통을 이교도의 영성으로 무시하고 유교의 윤리 전통을 구원 없는 도덕주의로 폄하하고 힌두교의 다신 사상을 혼합주의로 비난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힌두교는 기독교보다 훨씬 더 오래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종교이다. 그래서 엄청난 종교적 문화적 통합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도에 간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를 단순히 미신적 다신교라 비난했다. 문제는 이들 대부분이 힌두교의 문화적 깊이를 알지 못했다는 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더해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이 이른바 ‘힌두주의’(Hindutva)를 중심으로 강력해지면서 기독교 선교에 맞서는 강력한 저항으로 작동했다. 그러자 기독교는 이를 두고 힌두 민족주의는 기독교에 맞서는 폭력이고 기독교에 맞서는 것은 악의 세력이라는 단순한 논리를 확대 재생산하여 선교 실패를 합리화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