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 경쟁 사회의 폐해는 이제 제2의 천성이 되었다.
택시 운전을 하다 보면 교통 신호 위반, 주정차 위반을 많이 하게 된다. 그래서 한 달에 벌금으로 십만 원을 훌쩍 넘기기 일쑤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조심을 하지만 손님을 태우고 내릴 때보다는 콜을 받은 지점에서 기다리다가 주정차 위반을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5분 이상 주정차를 하는 경우 사방에 널려 있는 CCTV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힘들다. 그런 경우가 많아서 콜을 받은 지점에 도착하기 직전에 전화로 도착을 알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도 5분 이상 나타나지 않는 손님이 적지 않다. 그럴 경우 콜을 취소하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미 5분 이상 주정차를 한 상황이라서 벌금 고지서는 어김없이 날아온다. 콜 취소 기준이 5분이기에 5분 이전에 취소할 방법도 없다. 신호 위반의 경우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콜을 받을 때 3차선에 있었는데 바로 옆의 차선에서 유턴을 해야만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그런 경우 차선 변경을 시도하다가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주정차 위반보다 훨씬 센 벌금과 벌점이 부과되기에 몇 번 걸린 다음부터는 차라리 더 멀리 돌아가더라도 교통 신호 위반을 될 수 있으면 안 하게 된다. 그렇게 멀리 돌아가는 경우 콜을 기다리지 못한 손님이 콜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다. 돈을 벌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손님에게 받는 돈보다 벌금이 훨씬 많으니 손해를 감수하게 된다. 강한 제재가 질서 유지에 도움이 되는 것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교통질서 위반보다 더 위험해 보이는 것이 바로 이른바 ‘칼 치기’와 끼어들기 방해다. 시내 운전이든 교외든 거의 차이가 없다. 규정된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운전을 하다 보면 거의 대부분 끼어들기를 허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마치 모든 운전자가 안전거리는 끼어들기 허용의 신호로 받아들이라고 교육받은 것만 같다. 그래서 앞차와의 간격을 어느 정도 줄여보면 어김없이 칼치기가 시작된다. 대부분 깜빡이도 켜지 않은 채로 마구 밀고 들어온다. 그래서 사고가 날 뻔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현상은 끼어들기 방해다. 사이드미러를 보고 뒤차와의 거리가 충분하다고 여겨 차선 변경을 시도하기 위해 깜빡이를 켜자마자 그 차가 갑자기 속력을 내며 쏜살같이 달려온다. 그래서 차선 변경이 불가능해지기 일쑤다. 처음에는 그저 일부 몰지각한 아니면 급한 운전자가 그런 식으로 깜빡이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택시에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닌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0명 가운데 7~8명이 그런 행태를 보였다. 이 정도 수치라면 분명히 예외가 아니다. 특히 차종과 그 운전자의 성별이나 나이와 무관한 현상이다. 마치 운전면허를 취득할 때 ‘양보하면 죽는다!’는 교육을 받은 것만 같아 보일 정도다. 물론 그런 교육을 했을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과거 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운전하는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물론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나라에서 운전할 때 식은땀을 흘리는 경우는 많았다. 그렇지만 끼어들기를 위해 깜빡이를 켤 때 대부분의 운전자는 양보를 했다. 한국처럼 깜빡이가 마치 추월해도 좋다는 신호로 여기는 것 같은 현상은 없었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모두 왜 이러는 것일까?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여러 생각을 해보았는데 결국은 한국의 사회 고유의 전체적 기현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깊은 분석도 필요 없는 현상이기는 하다. 한국에서는 어릴 때부터 남에게 지면 안 된다는 교육이 지속되었다. 유치원 입학 전부터 이미 영어 교육이 시작되고, 교육은 결국 남보다 내가 더 잘난 것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많이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학교 안에서 성적 순이 인격 순으로 여겨지고, 좋은 성적이 더 많은 돈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위한 필요조건으로 인식된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성적은 반드시 상대 평가의 결과로 나온다. 학교만이 아니라 수능도 1등에서 꼴등까지 줄을 세워야만 속이 시원해지는 나라다. 그리고 SKY를 가기 위해서는 중고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입학 전부터 남을 이겨야만 된다. 그런 와중에 결국 지면 죽는다는 인식이 한국인의 DNA에 새겨진 것이다.
1점 차이로 학교가 달라지고 학교가 달라지면 사회생활의 출발점이 달라지고 출발점이 달라지면 인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그런 ‘지면 죽는다!’는 생각은 의식 세계만이 아니라 잠재의식 안에도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생활 모든 분야에서 ‘경쟁’과 ‘비교 우위’는 생존 본능이나 다름없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따지고 보면 나 자신도 그런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남을 짓밟고 올라섰기에 대기업에서 부장의 자리까지 올라서 본 것 아닌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그 경쟁에서 도태되어 임원이 되지 못해 밀려난 것이지만 말이다. 그 경쟁에서 어느 정도 버티지 못했다면 그나마 그 정도의 삶도 영위해 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은퇴 후 시작한 치킨집이 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경쟁력 없이 뛰어들어서 어설프게 돈을 벌어보려고 했으니 말이다. 경쟁력은 다른 경쟁자를 물리치는 것으로 증명이 되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타고나기보다는 갈고닦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익숙한 분야에서는 경쟁력을 보일 수 있지만 전혀 생소한 분야에서는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것인데 실패는 예정된 것 아닌가?
주제와 다른 이야기이지만, 자영업은 다른 업자와의 경쟁이 처음부터 안 되는 구조다. 프랜차이즈의 경우 본사에 납부하는 돈이 전체 매출에서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기에 그 시작부터 손해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점포와 경쟁을 하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물론 출혈 경쟁을 하는 방법이 있다. 사은품을 더 주고 양을 더 늘려 주는 식 말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문자 그대로 출혈만 일으키고 본사의 이익만 높여줄 뿐이다. 그런 구조를 알고 나서 결국 치킨집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스템은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의 논리가 적용될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발버둥 치고 알바를 줄여도 수익을 제고하는 데 한계가 있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점포 간의 ‘새치기’와 ‘칼치기’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내 가게에서 매출을 올리는 데만 신경을 쓰느라고 경쟁 점포와의 싸움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처음에 택시는 다를 줄 알았다. 그러나 근본 구조는 마찬가지였다. 사납금이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사업주가 뜯어가는 돈은 더 늘었다. 월급제의 명목이 있지만 과거의 사납금과 다름없는 기본금을 채우기 위해서는 과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회사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한 달 26일 기준으로 600만 원 가까운 돈을 회사에 내야 한다. 그 이상의 수익이 나면 회사와 분배하는 데 이 또한 회사마다 천차만별이다. 5대 5인 경우부터 7대 3인 경우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한 달 수익을 400만 원까지 내고 싶으면 적어도 1천만 원 가까운 매출을 올려야 한다. 그러니 칼치기와 불법 유턴을 해서라도 수익을 더 올려야만 한다. 기본적으로 10시간 근무이지만 실제로는 14시간까지 일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택시도 수입을 늘이기 위해서는 매출을 올리는 방법밖에는 없다. 그러나 수입 제고에 칼치기와 끼어들기는 부차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필요하지만 필수적인 요소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운전하다 보면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덩달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어느새 남이 끼어드는 것을 나도 방해하게 되고, 내가 끼어들기 위해 칼치기를 무릅쓰는 일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런데 막상 칼치기를 하고 남의 끼어들기를 방해하는 가운데 문득 깨닫게 된 것이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열에 한 두 사람은 끼어들기를 기꺼이 허용한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끼어들어서 빨리 가봐야 실제로 걸리는 시간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런데도 80% 가까운 사람들이 여전히 칼치기와 끼어들기 방해를 습관적으로 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어릴 때부터 들어온 무한 경쟁의 습관이 어느 사이 DNA에 심어진 탓으로 보인다. 그래서 거의 제2의 천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보다 앞서고 남이 나를 추월하는 것을 막아야만 생존이 가능한 사회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제오늘 깨닫게 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택시 운전을 해보면서 직접 체험한 결과 칼치기를 하고 끼어들기 방해를 해도 수입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그날의 운이 훨씬 크게 작용한다. 일을 시작하면서 정체 때문에 연속으로 콜 3개를 취소한 날이었다. 기분이 우울해진 상태로 강남으로 진입했는데 콜이 들어왔다. 목적지까지 5분. 차라리 마음을 비우자는 생각으로 천천히 차를 몰고 가보니 인천 공항을 가잔다. 인천 공항에서 손님을 싣고 나오면 하루 일당이 얼추 맞추어지는 것이니 횡재다! 그렇다 칼치기 끼어들기 방해를 안 해도 될 날은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날에는 다시 칼치기와 끼어들기 방해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교통 신호 위반도 한다. 실적에 무관하다는 것을 충분히 경험했는데도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남이 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남이 하는 데 나만 안 하면 뭔가 뒤처지는 느낌이 든다.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라 불안 더 나아가 공포가 밀려온다. 남들 다 하는 데 나만 안 하면 뭔가 손해 보는 느낌 정도가 아니라 사회에서 낙오될 것만 같다. 이런 증상은 비단 칼치기와 끼어들기 방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남의 아이가 유치원 입학 전부터 영어 공부하면 나도 해야만 한다. 남이 대치동 학원을 다니면 내 아이도 무리해서라도 보내야 한다. 남이 SKY에 목을 매면 내 아이의 실력과 무관하게 나도 그 길로 애를 재촉해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낙오 정도가 아니라 도태될 것 같은 공포감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분명히 과도한 사교육이 망국병이고 일류대를 지향하는 것이 정신병이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대세를 거스를 자신이 도저히 없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남이 하는 대로 흉내는 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런 무한 경쟁 사회의 후유증을 대부분의 국민이 앓고 있으니 칼치기와 끼어들기 방해는 사실 애교 수준의 것으로 밖에 안 보일 정도다. 그래서 오늘도 보면 80% 정도의 운전자가 여지없이 칼치기와 끼어들기 방해를 한다. 마음공부를 아무리 진하게 해도 이 추세를 극복하는 것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워 보인다. 잘못인 줄 알면서도 잘못을 강요하는 사회에 태어난 죄인가? 아니면 이것도 다 팔자소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