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종말론이 힘을 잃어버렸다.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 모순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도 싫어했던 위선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 문제는 예수의 가르침이 보통 사람에게는 실천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것이라는 데 있다. 예수의 유명한 산상수훈을 보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8~42)
이어지는 가르침은 더 심하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여기 나오는 내용은 누가복음에서 종합하여 되풀이된다.
“그러나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누가 6,27~36)
문헌의 역사로 볼 때 마태복음이 ‘Q문서’와 마가복음을 참조해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이 내용은 마가복음에는 안 나온다. 그러니 ‘Q문서’에도 안 나오는 다른 문서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인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마태복음을 누가복음이 참조해 변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종말론을 가장 극적으로 강조한 것은 마가복음이다. 그런데 예수가 승천하고 나서도 재림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은 채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이에 따라 예루살렘의 기독교 공동체도 깨지자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큰 혼란이 왔고 예수의 재림이 조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수의 재림이 그들이 살던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믿음은 변치 않았다. 그래서 종말에 대비한 삶의 자세는 강조된 것이다. 그래서 위에 나오는 강력한 종말론적 윤리 강령이 유지되었다.
문제는 예수의 재림이 2천 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이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는 사실이다. 사실 서기 1000년이 될 때 기독교의 지배를 받던 유럽인들은 종말이 올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 재산을 정리하고 말세에 대비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말세는 오지 않았다. 14세기에 들어 흑사병이 유럽을 초토화시키자 유럽인은 다시 종말이 온 것으로 확신했다. 그러나 인류는 살아남았다. 이렇게 죽다 살아나는 경험을 몇 차례 한 유럽의 기독교인은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오는 종말에 대한 확신이 더욱 줄어들게 되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발발한 양차 대전의 경험과 더불어 핵무기, 기후 변화, 전염병이 인류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는 ‘과학적 종말론’이 기독교의 종말론보다 더 설득력을 가지게 되면서 종말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지구만이 아니라 태양계 전체 더 나아가 은하계도 생성소멸의 자연법칙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인류의 종말이 신의 명령과 전혀 무관하게 일어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는 인식이 생긴 것이다. 과거 기독교가 인간 정신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인류의 죄악이 종말을 가져온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확신은 개인적 믿음의 차원으로 환원되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 머물게 되었다. 과학적 종말론에 따르면 인류의 선행과 악행, 인류의 죄는 종말에 아무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종속 변수일뿐이다. 물론 자연을 파괴한 결과 인류의 종말을 좀 더 앞당길 가능성은 있지만 이는 우주 전체의 생성소멸의 법칙에서 볼 때 ‘사소한’ 종속 변수일뿐인 것이다.
결국 인간이 죄와 무관하게 종말이 온다는 ‘과학적 진실’ 앞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허구나 신화적인 차원의 것으로 그 격이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 신자가 예수의 종말론적 가르침에 무심한 것은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인다. 그러나 죄의 개념이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기독교가 근대호와 자연과학에 그토록 적대적이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종말은 인간의 죄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현상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어느 모로는 우주의 영고성쇄에 관한 이해는 불교가 더 합리적인 해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의 종말은 죄악이 아니라 그리고 더 나아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인 것이다. 지금까지 물리학이, 특히 천체 물리학이 밝혀낸 진실은 140억 년 전쯤 우주가 정확히 말해서 인간이 살고 있는 물질세계가 출현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에너지가 폭발을 일으켜 물질로 전환된 것이다. 그리고 그 물질세계는 매우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다. 그 팽창의 끝이 어디에 이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이론으로는 두 가지 설이 유력하다. 우주가 무한히 팽창하다가 결국 충선처럼 부풀어 터져 버린다는 것이다. 그와는 반대로 일정 수준까지 팽창하다가 다시 축소하여 빅뱅 이전의 특이점 상황으로 환원되고, 다시 빅뱅이 이루어지는 순환 구조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밝힐 수 없다. 그 이전에 인류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니 말이다. 우리의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은 50억 년 정도면 수명을 다해 적색 거성의 단계를 거쳐 백색 왜성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에 삼켜져 그 흔적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를 대비해 우리 은하계 안의 다른 골디락 존에 있는 행성을 찾자고 하지만 현재의 과학 기술로는 그저 꿈에 불과한 계획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우주적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인류 자신이 서로에 대한 증오와 과학기술의 발전에 따른 부작용으로 자멸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우울한 미래를 알고 있다면 예수의 가르침이 아무리 종말을 전제로 한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해도 '먹히지 않는' 이상적인 윤리도덕적 지침이 될 뿐이다. 어차피 인류는 멸종할 것인데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보장이 없는데 무엇하러 남을 위해 나의 목숨까지 바치는 고생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특히 기독교인은 더 이상 예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데 목숨을 바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살 인생인데, 그리고 궁극적으로 인류는 공룡과 마찬가지로 소멸할 종에 불과한데 무엇하러 살아 있는 동안 불확실한 사후의 보상을 위해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래서 과학적 지식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그리로 소멸이 분명한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예수의 가르침을 성실히 실천한다는 것은 손해일뿐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늘도 이기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기독교 신자의 지도자를 자처하는 목사들의 '타락'이 그들의 일탈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자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돈과 여자 문제 그리고 정치 관여로 사회의 악이 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서초동의 대형 교회에서 판검사들 앞에서 예수의 대리자나 된 양 으스대는 어느 목사도 박사학위로 사기를 죄를 지었음에도, 정확히 말해서 십계명의 거짓말하지 말라는 신의 계명을 어겼음에도, 그것도 모자라 비서 8명을 두고 그 비서가 몰래 번역한 외국 학자의 원고로 일요일에 뻔뻔하게 자기가 작성한 원고인양 설교를 해도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꼴을 보고 어느 기독교 신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자기희생을 할까?
예수의 가르침은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나의 형제자매나 친척 친구가 아니라 원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각오는 종말에 대한 확신 그리고 죽은 다음 부활하여 영생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바탕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인은 그런 부활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다. 이런 사실은 여러 통계 자료로 확인된다.
결국 예수는 헛수고한 것인가? 어차피 종말은 오지만 그 종말에 대한 확신으로 인간 사회 개선을 추구한 예수의 노력은 이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것인가? 그런 예수의 헛수고를 다름 아닌 기독교의 성직자와 신자들이 스스로 보여주는 모순적 상황 앞에서 확인해야 하는 현실이 참으로 쓸쓸하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의 모습이 더욱 처량하다. 그를 위해서 뭔가 해야 하는데, 희망이 안 보인다. 예수는 분명히 말했다. 우리 주변의 가장 작은 이, 곧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마실 것을 주고 힘들 때 함께 하는 것이 곧 예수를 위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헌신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예수의 당부를 실천하는 성직자와 기독교 신자는 이제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개인적 종말을 각오하는 그런 기독교인이 안 보인다. 어찌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