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자체가 죄인의 소굴이 되었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주로 아픈 이, 과부, 가난한 이, 하층민, 소외된 이를 측은히 여기고 도왔다. 그 반대로 권력자나 부자는 멸시하고 저주까지 했다. 오늘날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인간을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인류를 구하는 구세주라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안 그랬다. 심지어 예수는 유대인 외에는 구할 생각도 없었다.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에서 그런 예수의 의지가 절묘하게 드러난다. 그런 예수를 교주로 삼은 기독교는 실제로 매우 인종차별적인 종교로 유럽 사회를 지배했다. 유대인을 끊임없이 학대하고 그들을 죽이고 재산도 몰수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유럽의 기독교는 권력자와 상인들이 아프리카 원주민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상품으로 여기며 매매하고 학대하고 죽이는 짓을 해도 전혀 나무라지 않았다. 그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을 예수의 이름으로 학살하고 그들의 재물을 착취해도 유럽의 기독교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다. 그런 기독교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갑자기 인본주의의 대변인인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기독교가 박해받은 종교인양 호들갑을 떨지만, 기독교 신앙 때문에 이른바 ‘순교한’ 자들의 숫자는 역사를 통틀어 다 합쳐봐야 만 명도 안 된다. 신학자 프렌드의 계산에 따르면 최대 5천 명에 불과하다. 그들 대부분은 네로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희생당했다. 그 이후에는 기독교의 이름으로 순교당한 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물론 한국과 같이 선교 시대에 예외적으로 수백 명의 순교자가 나온 경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이름으로 살해한 이들의 숫자는 수억 명에 이른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기독교를 거부한 원주민을 문자 그대로 학살했다. 물론 그 배경은 약탈이었지만 명분은 기독교를 거부한 것에 있었다.
이런 기독교 교회의 ‘정신’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다. 비록 예수가 매우 인종주의적으로 유대인의 구원에만 신경을 썼지만 그 한도 안에서 예수는 분명히 사랑의 실천에 노력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위에서 말한 사회적인 주변인, 곧 보잘것없는 이들을 중심으로 베풀어졌다. 결코 모든 인류의 구원을 예수는 추구한 적이 없다. 그런 예수를 믿는 종교이기에 기독교는 여전히 배타적이고 편협한 편 가르기에 열심인 신앙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가 가장 인도주의적인 종교로 선전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정신이 소외되고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중심으로 실천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예수의 행동이 지금도 세상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른바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는 일은 극히 일부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빼고는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무한 경쟁이 당연한 자연의 원칙만큼의 위력을 발휘하는 21세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는 반드시 소외 현상이 발생한다.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 소외만이 아니라 삶 자체에서 소외되는 일이 흔히 벌어진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더욱 강화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생존에서 경쟁자, 곧 적이 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은 피곤할 뿐 아니라 두렵고 외로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다. 오늘 친구가 내일 적이 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는 믿을만하다. 기독교 신자들이 말하는 대로 예수는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는 사회에서 밀려나는 이들, 곧 소외된 이들에게 더 큰 사랑을 약속하기에 의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예수는 21세기에 소외된 이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가? 예수에게 열심히 기도하면 가난에서 벗어나고 사회적 고독에서 벗어나고 사회적 곤경에서 벗어나는가? 물론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부자가 되고, 기도를 간절히 했더니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삼성에 취직하게 되었다는 사람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예수가 과연 그런 일을 돕는 존재일까?
물론 성경에서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11)
그런데 같은 뜻인데 루카복음에는 비유가 다르게 나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마태복음은 빵과 돌, 생선과 뱀이 비교되지만 루카복음에는 생선과 뱀, 달걀과 전갈이 비교된다. 당연히 이런 차이는 마태 공동체와 루카 공동체가 서로 교제하지 않고 예수를 추종한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이 공동체는 예수가 한 말을 나름대로 기억하고 편집하여 그 속 뜻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가 말한 ‘너희’는 온 인류가 아니다. 그를 추종한 유대인일 뿐이다.
이런 예수의 말을 근거로 기독교 신자는 예수의 이름으로 신에게 청하면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쉬운가? 아무리 기도해도 노력하지 않으면 돈을 벌 수 없고, 공부하지 않으면 서울대학교에 갈 수 없고, 스펙을 쌓지 않으면 삼성에 취직할 수 없다. 기적이 일어나면 모를까?
그런데 예수가 너희라고 부른 이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구절도 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0~13)
비슷한 내용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나온다. 여기서 예수를 필요로 하는 이들이 모든 인류가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강조된다. 예수는 병든 이들, 특히 죄인들을 ‘너희’라고 부르고 그들의 병과 죄를 씻어주기 위해 활동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 활동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행위였다고 기독교 신자들은 믿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기독교 교회 안에는 몸과 마음에 병든 이들, 죄를 지은 이들이 모여있는 것이다. 병이 없고 죄가 없는 이들은 기독교 교회가 필요 없다. 특히 21세기 들어서면서 인간의 죄의식은 더욱 줄어들었다. 사실 죄의식은 기독교 교회가 신자들에게 강제로 심어준 것이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다. 멀쩡한 사람에게 갑자기 너는 죄인이다라고 단죄한 것이 기독교 교회다. 왜 죄인이냐고 물어보면 특히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이른바 septem peccata capitales 또는 septem peccata mortalia, 곧 일곱 가지 ‘죽을죄’를 나열한다. 여기에는 superbia, avaritia, invidia, ira, luxuria, gula, pigritia, acedia, 곧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있다. 기독교 교회는 이 죄를 지으면 지옥에 가서 영원할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협박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 모든 죄는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나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모든 사람은 이 죄의 그물에 걸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주일마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그 죄를 용서받은 대가로 보속을 하면서 바쁜 이는 면죄부를 살 수밖에 없는 구조적 악의 고리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죄의 구조를 만들에 신자들을 구속하는 매우 큰 죄를 지어왔다. 예수가 전혀 언급하지 않은 죄를 교회가 만드는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그 이유는 물론 신자들의 죄의식을 강화하고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 죄의식 속에서 기독교 신자는 구원과 용서를 갈망하게 되고 그 구원과 용서를 해주는 신과 예수를 대리하는 교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오히려 교회가 신자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회의 권위는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너진 교회를 믿을 수 없는 신자들을 교회를 버리기 시작했다. 당장 독일 교회만 보아도 2024년 기준으로 가톨릭 산자는 2000만 명, 개신교 신자는 1800만 명에 ‘불과’하다. 독일 인구가 8,400만 명이니 기독교 신자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추세는 지속되고 있다. 지난 10년만 보아도 독일 가톨릭 신자는 거의 500만 명이 줄어들었다. 개신교도 엇비슷하다. 10년 만에 1000만 명이 줄어든 것이다. 게다가 남은 신자 가운데 주일 미사나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6% 정도에 불과하다. 신자들의 죄의식이 없어진 것인가? 예수의 말대로라면 더 이상 병도 안 들고 죄도 없어진 모양 아닌가? 아니다. 예수가 원래 도와주려고 했던 병든 이, 가난한 이, 소외된 이는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과연 이들은 이제 누구를 찾아야 하나? 일요일에 교회에 나가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오늘날 교회는 병든 이, 가난한 이, 소외된 이를 돕기보다는 웅장한 교회를 짓고, 목사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부자와 권력자를 더 사랑하고 있으니 더 큰 문제 아닌가? 이런데 예수가 정작 돕고 싶은 죄인과 병든 이를 도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