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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예수는 왜 조직이 아니라 사람에 충성했나?

인간이 신의 영혼을 담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by Francis Lee

예수는 그의 일생동안 지상에서의 성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를 따르는 사도가 12명이고 그에게 밥을 얻어먹고 병치료를 받고 이들을 다 합치면 최대 수만 명에 이르렀지만 그들을 이용하여 건축 헌금을 거두어 교회 건물을 지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자가 많았어도 흔히 조직의 보스가 하듯이 계급을 만들고 조직을 구성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함께 식사를 하고 진리를 설파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조직이 아니라 그가 만난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지금 예수를 내세우며 설쳐대지만 오로지 부동산 투기와 헌금 모금에 열을 내는 기독교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 것이다.


사실 예수 정도의 치유 능력이 있다면 이른바 '떼돈'도 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돈과 제자들을 이용하여 신흥 종교 교주가 될 수도 있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그 잘난 치유 은사를 발휘하는 목사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러지 않았다. 치유는 모두 무료였다. 먹을 것도 무료로 주었다. 예수는 평생 돈을 단 한 푼도 받지 않았다. 조직 관리에는 반드시 필요한 그 돈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교회는 헌금과 십일조 거두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조직이 없으니 돈이 필요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헌금도 십일조도 거두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예수 정도의 '능력'이 있는 존재가 왜 조직 만들기에 관심이 없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기독교 교리 차원에서는 예수가 신의 외아들이고 인류를 구하기 위해 죄를 대신해 희생제물이 되려고 세상에 온 것이니 세속적인 조직, 출세, 치부에는 관심이 없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가 아닌 이들의 눈으로 볼 때에 이는 지극히 비논리적인 해석에 불과하다. 그리고 현재 인류의 4분의 1만 기독교 신자이고 나머지 60억 명의 사람은 기독교를 모르니 그들을 설득하려면 좀 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예수가 하늘로 오르기 전에 자기의 말을 땅끝까지 전하라고 했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리로 예수를 설명해야 마땅한 일이다. 그저 교리서에 나온 도그마를 앵무새처럼 외워서 비기독교인에게 전해서는 전교를 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상학자 후설의 말처럼 zurück zur Sache, 곧 본론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독교의 본론은 당연히 성경이다. 특히 예수의 언행을 비교적 역사적으로 기술한 공관복음, 곧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다. 요한복음은 신학과 교리로 너무나 '오염'되어 있기에 원래의 예수 모습을 찾아보기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다. 물론 서기 100년을 전후한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알기 위해서는 매우 좋은 자료가 된다. 특히 신약성경에서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예수를 본 적도 없고 그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는 바울 한 사람의 편지만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기독교의 에센스를 알기 위해서는 공관복음서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는 고사하고 그의 직제자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신약성경 27권 가운데 공관복음서 요한복음 사도행전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의 언행에 직접 관련이 없는 문서들이다. 더구나 그 나머지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는 14개의 문서는 바울이라는 한 개인의 편지에 불과하다. 그의 개인적인 신앙적 관점을 모아 신약성경이라는 거룩한 책을 만든 것이다. 이런 결정을 처음 내린 것은 성령이 아니라 마르시온이라는 학자다. 그가 바울의 서신을 정경의 반열에 올려야겠다고 결정하고 그렇게 방향이 정해진 것이다. 사실 예수와 기독교에 관련된 문서가 수백 가지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당시 흔히 쓰인 그리스어로 작성된 것이다.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는 고사하고 유대인의 모국어인 히브리어로 작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을 36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단 27개의 문서를 모아 신약성경으로 만들었다. 누가 이렇게 결정할 권한을 누구에게 주었다는 말인가? 결국 승자의 권리였다. 이른바 이단을 척결한 교회 내 세력자가 자기들 맘에 드는 문서를 모아서 신약성경을 만든 것일 뿐이다. 이후 이들이 버린 나머지 수백 개의 문서는 '위경' 또는 '외경'이라는 불량스러운 명칭으로 배척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문서라고 해도 예수의 언행을 이해하는 데에는 신약성경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예수에 관한 신뢰할 만한 문서는 이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문제가 된다. 예수라는 어마어마한 존재에 대한 문서가 이토록 빈약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 문서도 승자의 편향된 원칙으로 편집된 것이기에 예수의 모든 언행을 '객관적'으로 담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의 언행에 관한 문서로 성경을, 특히 공관복음서를 대체할만한 것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상식적으로 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기독교에서는 신의 아들로 여기며 궁극적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여기는 예수의 삶에 대한 자료가 이토록 빈약한 사실 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자료 부족으로 예수에 관한 많은 전설이 나올 수밖에 없는 일이 되었다.


그래도 예수의 언행에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을 이끌어 내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은 이유는 예수가 문자 그대로 언행일치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메시지는 간단하다. 자기가 제자와 주변 사람을 사랑한 그대로 그의 제자를 자청하는 이들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사랑은 요즘 기독교인들이 흔히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하는 입만으로 하는 사랑이 아니다. 문자 그대로 헌신적 사랑이다. 이웃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랑이다. 실제로 예수는 그런 사랑을 실천하다가 자기 목숨까지 바친 삶을 살았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교회라는 조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늘 상대방과 1대 1의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실천했다. 예수가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직접 흙을 개고, 침을 바르고, 손으로 어루만지고, 상대방에게 다가가 위로의 말을 전했다. 이른바 신의 아들이라고 거들먹거리면서 건방지게 멀리 떨어져서 제자들을 대신시키지 않은 것이다. 요즘 목사나 신부가 거들먹거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겸손한 태도였다.


그런데 도대체 신의 아들, 그것도 외아들인 존재인 예수가 이토록 겸손하게 인간에게 그것도 병들고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다가간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런 하찮아 보이는 인간이 모두 신의 모습으로, 신의 영혼을 담은 '아담'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세기에 보면 신은 우주 만물을 모두 그의 '말'로만 창조했다. 하늘과 땅도 말로 창조했다. 공중의 새와 땅 위의 짐승과 물속의 물고기도 말로 창조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인간만 직접 신의 손으로 흙을 빚어 형체를 만들고 그 코에 자신의 입김, 곧 영을 불어넣어 만들었다. 인간의 몸 안에 신의 영이 깃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곧 신의 본질을 담은 일종의 그릇이 된 셈이다. 그래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자신 있게 선언할 수 있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 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 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34~40)


이 구절은 최후의 심판에 관련된 유명한 비유다. 그런데 이 비유는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에 처한 인간이 사람의 아들에게는 형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특히 병들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곤경에 처한 인간이,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이 자신의 형제라는 선언을 이 비유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요한복음이 주장하는 것처럼 신과 함께 존재한 예수의 피조물이 아니라 형제다. 그러니 그들을 돕는 것은 인간을 불쌍히 여긴 신의 시혜가 아니라 형제애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형제애는 유대교의 정신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정신에서 모든 인간은 신의 모상이다. 야훼 신은 빛과 어둠, 밤과 낮, 하늘과 땅, 별과 달을 모두 말로 창조하였다. 식물과 동물도 말로 창조하였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26)


그런데 야훼 신은 구체적으로 인간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세기 2,7)


야훼 신은 인간을 직접 손으로 빚은 것도 모자라 그 코에 생명의 숨, 곧 자신의 영을 불어넣어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모습을 지닌 것도 모자라 신의 영을 지닌 지고한 존재가 되었다. 반대로 말하면 신은 인간을 닮은 모습을 한 존재다. 이런 관점을 인간중심주의적 신관이라고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신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유대교에서는 신의 영이 인간 안에 깃들어 있다고 주장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는 아예 신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 사이에서 사는 수고까지 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 정도로 인간이 신에게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바로 그런 기독교, 정확히 말해서 예수 정신에서 출발한 원래 기독교에서 현대의 인본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흔히 인본주의가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에 반발한 새로운 사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근원을 보면 결국 예수 정신이다. 과연 예수가 신의 아들인지 신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 답은 신앙의 영역에서 찾는 기독교 신자들과 비기도교인들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정신의 신관에서 인간은 신이 직접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간 사이에서 먹고 마시고 울고 웃고 어려움 속에 있는 인간과 더불어 살면서 인간의 병을 치유하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대상으로 자리매김을 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신의 유일한 관심사는 인간인 것이다. 이럴 수 있는 근본적 이유는 위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내면에 신의 영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서 정의한 인간 존엄의 사상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원래의 기독교 정신인 예수 정신을 되살리는 길만이 사양길에 접어든 기독교의 부흥의 단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오로지 교회 건물 건축에만 몰두하고 그 건물 안에 모여 돈벌이에만 급급한 자칭 성직자가 발호하는 한 예수 정신의 부활은 불가능한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종교 개혁, 더 나아가 예수 정신의 부활이 필요하다. 과연 누가 그 일을 시작할 것인가? 어도 기독교 목사나 신부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요즘 한국에서 에수를 입에 달고 사는 목사나 신부 가운데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갇힌 사람과 함께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우해 자기 목숨을 내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단 한 명도보지 못할 것이다. 외국은? 역사적으로 콜베 신부와 본회퍼 목사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거의 전부일뿐이다. 그런데도 오늘도 여전히 일요일만 되면 목사와 신부는 예수만 외쳐댄다. 그것도 안온한 교회 건물 안에서 말이다. 그러고도 예수를 믿는단다. 그 말을 과연 누가 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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