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있어 거리를 걷는다. 나무가 있어 도시 생활자로 살아간다.
나무를 보기 위해 숲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무는 숲에 있어야, 나무끼리 어울려 있어야 나무라고 생각했다. 홀로 있을 때 나무는 아름답지 않다. 실내 화분에 꽂힌 나무는 참혹하다.
거리에 나무가 있다. 도시의 길에 나무들이 있는 것이다. 거리나무, 길나무, 가로수라고 한다. 서울의 길나무는 주로 양버즘나무나 느티나무, 은행나무이고 가끔은 회화나무, 또는 드물게 감나무나 메타세콰이어가 있다.
한동안 사무실이 있던 남산 소월길은 은행나무가 주종인데, 요즘 같은 가을이면 길이 온통 예쁘고 더러워진다. 이크, 물컹한 열매를 밟으면 산책을 끝내고 돌아와서도 내내 은근한 똥내에 시달렸다. 은행 냄새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그래도 은행나무가 좋다. 수형도 멋있고 잎도 근사하며 열매는 유익하다.
플라타너스의 본래 이름은 양버즘나무다. 양버즘이라니, 이름이 입에 붙지 않고 느낌이 지저분하다. 양버즘보다 플라타너스라 부르자. 발음에서 작은북 소리가 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로 시작하는 김현승의 시가 좋았다. 플라타너스는 도시의 거의 모든 길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나무가 좋은 건 든든하고 우람해서다.
도심에 심겨진 플라타너스들은 굳건하다. 가끔 둥치만 남기고 모조리 가지치기를 당하는데, 발라먹은 닭뼈처럼 앙상하게 가지를 잘린 뒤에도 굳세게 겨울을 견디고는 봄이면 겨드랑이에서 연록색 손바닥들을 소복하게 내민다. 그러고는 다시 풍성한 잎 그늘을 도심에 드리운다. 장하다 플라타너스.
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선생이 운동장으로 우리를 불러내고는 그리라고 지시한 게 플라타너스 둥치였다. 가만 보면 묵은 겉껍질이 하나씩 뜯겨지는 둥치는 자체로 그림 소재였다. 용케 그걸 발견해낸 미술 선생. 뭉크의 그림에 나오는 남자처럼 오종종하게 생긴 그 선생은 심혈을 다한 내 미술작품에 최하점을 주기도 했다. 개구리위장복 군복 무늬 플라타너스 둥치는 그리기 쉽지 않다.
어릴 때, 정자나무라고도 불렀던 느티나무는 깔끔해서 좋다. 꽃도 열매도 보이지 않지만 단정하게 오래 자라 품위 있는 거목이 된다. 이맘때 밝은 날, 느티나무 아래서 위를 바라보라. 초록에서 고동까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색의 프리즘이 펼쳐진다. 실로 가장 화려한 단풍이다.
올림픽대로를 서에서 동으로 달릴 때, 여의도 구간에는 단 며칠간, 길과 길 사이에 노란 살구가 한 무더기 떨어져 있다. 매년 그걸 보며 계절의 지점을 기억한다. 저 나무가 살구였구나. 벚꽃인줄 알았는데. 이상한 일이지만 그럴 때 마음이 처연해졌다.
오래된 아파트 2층으로 이사한 이유는 순전히 나무들 때문이었다. 거실에 나서면 산수유와 라일락, 마로니에로 이뤄진 작은 숲의 지붕이 보인다. 환한 햇살과 함께 나무의 검푸른 그림자가 거실에 가득하다. 나와 아내는 이 나무들이 있어 도시생활자로 살아간다.
철 지난 잡지에서 우연히 가로수에 대한 글을 읽었다. 기사의 마무리는 이랬다. ‘나는 어느 날 가로수를 발견했고, 도시에서의 산책은 그 뒤로 더욱 즐거워졌다. 회색건물들 사이를 걷지만, 문득 숲을 바라본다.’ 좋은 문장이다.
당연하지만, 서울에 나무가 있어 참 좋다. 나무가 있어 거리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