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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Sep 18. 2019

내게 강 같은 평화

단단해지기 위한 상처 따위는 필요 없다. 대체 무엇을 위해?

집은 한강의 서쪽에, 회사는 그 강의 동쪽에 있다. 강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이 사실의 인과관계를 떠올렸을 때 알았다. 왜 출근이 힘들고 어째서 퇴근이 평화로운지. 이건 흐름의 문제로구나. 아침에는 강을 거슬러야 하고 저녁에는 물 따라 천천히 흐를 수 있기 때문에. 누가 뭐래도 나는 그렇기에 그렇구나 생각한다. 한강과 나란한 간선도로는 저녁이면 언제나 느리고 느리게 강의 흐름과 보폭을 맞춘다. 물결에 비친 강 건너 불빛은 매일 일정한 운율로 반짝인다. 오른쪽 차창으로 강물이 함께 갈 때 비로소 안도를 느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굳이 그러하다.


남산 기슭에 사무실이 있을 때 한동안 힘겨웠다. 누군가 그건 내 자리가 산을 마주보는 방향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니 어서 책상을 돌려 산을 등지고 앉으라고. “흥, 미신 따위는 안 믿지.” “아니, 풍수는 과학이라고.” 어쨌든 됐고. 자리를 바꾸는 대신 매일 순환도로를 악착같이 걸었다. 강제 순환의 습관이 신비한 효험을 발휘할 무렵 산기슭을 내려와 회사는 강 건너로 이사했다.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이 좋아졌다. “거봐, 그렇다니까.” 그는 손뼉을 쳤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치고.


거스르는 게 버겁다. 말이든 의견이든 주장이든 논리든 대항하는 일은 심장에 부담을 느낀다. 누군들 그러지 않을까 싶지만 언제부턴가 그냥, ‘예 그래요’ 하는 게 편하다. 쑥맥같이 덮어놓고 그런다 한들 크게 손해 볼 아무것도 없다. 주장을 관철하고 논리 앞에 무릎 꿇리는 건 의외로 쉽지만 대가로 잃는 게 많다. 이럴 때 놓치는 건 꽤 소중하다. 이를테면 관계 같은 것. 크든 작든 감정의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각오해야 한다. 단단해지기 위해 상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상처가 필요한 단단함은 의미 없다. 대체 뭘 위해?


전에 누가 환상적인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을 알려줬는데 의외로 간단하다. 아내의 모든 다른 의견에 남편은 이렇게 말하면 된다더라. “아, 그런가? 미안허네.” 전제는 없다. 무조건, 무조건이다. 해보니 실로 유용했다. 말할 때 포인트는 ‘하’를 ‘허’로 발음해야 한다는 것. 비법을 일러준 그는 집을 나갔다 돌아온 뒤 수백 번 아내에게 그렇게 했다고 한다. 죽고 살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 바득바득 우길 건가. 대단한 묘책이라도 일러주듯 그는 또 말했다. 관계의 충돌은 서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긴다. 휴일에 집에서 부부가 싸우게 되는 건 마주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밖으로 나가야 한다. 산책이나 드라이브라도 가면 즉시 해결되는데 그 이유는 한 방향을 보며 나란히 가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이 좋다. 여의도 빌딩 너머 노을이 다 들어갈 무렵, ‘개와 늑대의 시간’에 간선도로 서쪽 방향에 있는 것이 좋다. 적당한 체증으로 밀리는 길에 앉아 강과 함께 흐르는 그때. 피곤한 일과 후라면 더 좋다. 기진한 상태. 약간 아쉽고 뭔가 충만한 상태. 이럴 때 마음이 축축해져서 조금 외롭다고 느끼는데 그러면 문득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문제는 매번 마땅한 상대가 없다는 것. 번호를 누른 뒤 ‘그냥’이라고 말할 사람이 없다니. 언제 이렇게 되었나. 시나브로 친구가 없어졌다. 모르는 사이 전화도 만만히 걸어볼 수 없을 만큼 멀어진 상태로.


미국의 미치광이 낚시꾼이자 임상심리학자인 폴 퀸네트는 인간관계를 대륙이동설에 비유한다. 좋은 관계는 어떤 일을 놓고 한 번의 말다툼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작은 균열이 벌어져서 어느 날 가깝다고 여기는 두 사람이 고개를 들어보면 서로 멀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지구의 지각에 단층이 있고 서로 미세하게 이동해가듯 인간관계에도 단층선이 생긴다는 주장이다. 전화 걸 리스트를 떠올리다 보면 그의 책 한 구절을 상기하게 된다. 때로 두 사람은 아주 잘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지층에 서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한번 엇갈린 평행선은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건 사랑한다는 의미이며 한 방향으로 시간을 계속 흘려보낸다는 말이다. 나는 그걸 그 사람과 강변에 앉아 페르세우스 유성우를 기다리던 그때 알게 되었다. 나란히 불편하게 고개를 쳐들고 찰나의 유성을 기다리면서. 가끔 똑같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깨우쳤다. 생각해보니 그 사람과 많은 시간을 같이 흘려보냈다. 인생의 비밀도 약간은 알게 되었다. 퇴근을 기다리듯 날마다 봄날을 기다린다. 봄이 오면 그 사람과 자전거 타고 강의 상류를 향해 달리고 싶다. 그때는 물을 거슬러도 편안할 것이다. 어차피 봄바람은 서에서 동으로 불고 바퀴는 조팝꽃 풀숲가로 나란히 앞을 향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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