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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Oct 03. 2019

생활명품 예술가

우리 곁에 예술가가 살았다

‘아까운 사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자 동네 아지매들은 이구동성 엄마를 그렇게 추억했다.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 짐작한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엄마는 응당 그런 상찬을 들어 마땅한 분이었다. 글을 시작하자니 조금 감정적이 되려 해서 걱정인데, 오늘의 주제를 마무리하려면 이런 추억담으로 가닥을 잡아야 하니 계속 가보련다.


한과와 소쿠리. 엄마가 아까운 사람이라면, 다른 건 몰라도 재능을 가지고 아깝다고 이야기하려면 이 두 가지 사물에 대해 말해야 한다. 엄마는 적어도 한과와 소쿠리를 만드는 데 있어서는 일찍이 장인의 반열에 오르셨다. 한과, 그 중에서도 유과는 어릴 적 내가 유독 싫어하던 간식이었는데, 별식이랄 게 변변찮던 그 시절에도 유과는 싫었다. 밍밍하고 푸석하고 씹을 때 어쩐지 허무한 느낌이 들던 유과는 맛과 식감에서 나를 사로잡지 못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요즘 말로 당대의 ‘겉바속촉’이었건만 이미 ‘뽀빠이’나 ‘라면땅’ 같은 자극적 과자에 길들여진 어린 입맛을 되돌리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감히 말하거니와 엄마의 한과, 그 중에서도 누에고치처럼 탐스럽게 부푼 찹쌀유과는 군색하던 시골 마을의 명절 음식 수준을 한 차원 격상시켜 놓았다. 아버지의 회고에 의하면 나 어릴 적, 동네 집집마다 유과를 너나없이 만들어대던 풍습이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 한과 자체야 엄마의 발명품이 아니었겠지만 보기 좋고 탐스럽게, 다시 말해 제사상 복판에 올려놓기에 적당할 만큼 질 좋은 유과는 그 이전 우리 마을엔 존재한 적 없었다는 뜻이다.


유과는 만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일단 제조 기간이 길다. 해마다 섣달이 되면 온 동네가 유과 만들 준비를 했다. 요즘 같으면 번거로워서라도 하지 않을 음식을 으레 준비했던 건 정월 초하루 제례음식 목록에 참깨 볶아 곱게 입힌 찹쌀유과가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찹쌀을 며칠 물에 담가둔다. 완전히 불린 쌀을 씻고 빻고 찌고 치대서 반죽을 만든 다음 홍두깨로 얇게 밀어 가위로 추잉검 크기로 잘라 쌀가루를 묻혀 잘 말려야 한다. 이 과정이 고역인 것이 군불 땐 안방 가득 널어놓은 조그만 떡 조각들이 잘 마르도록 하나씩 일일이 뒤집어주는 일을 내가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천연색소를 섞은 조그마한 반죽 조각들이 행과 열을 맞춰 온 방에 널린 모습은 기가 차도록 아름다운 거였다. 반죽이 말라가는 고유의 냄새도 싫고 뒤집는 일도 지겨워 얼마나 말랐는지 수시로 눌러보다 손톱자국 생길라 할매한테 잔소리깨나 들었다. 이렇게 사나흘 말리면 반죽이 딱딱하게 굳어 한 손으로도 딱 부러지는데 이때 장작 가마솥에 기름을 끓여 버글버글 튀겨내는 것이다. 아, 지금 생각해도 눈에 선연한, 작고 납작한 반죽이 끓는 기름으로 들어가면서 누에고치처럼 하나씩 몽글몽글 부풀어오르는 모양이라니. 그건 감탄이고 장관이고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이 과정은 엄마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거였다. 유과 튀기는 작업을 우리는 ‘일군다’고 했는데, 이 일궈내는 과정은 정말이지 장인의 손길에서 예술작품이 탄생하는 순간 같았다. 매끈하고 오동통한 유과에 조청을 입히고 곱게 빻은 쌀튀밥 가루나 흑임자, 들깨를 묻혀내면 드디어 유과 제조 공정이 마무리되었다. 근동 아낙들이 아무리 배워도 울퉁불퉁 잘 되지 않던, 한 입 베어 물면 하얀 실밥 같은 속살이 균일하게 가득 들어찬 유과. 이런 유과를 나는 지금도 잘 먹지 않는다.


결혼 후 아내가 잘 챙겨둔 엄마 유품 중 소쿠리가 있다. 우리 동네 표현으로는 ‘쟁대미 소고리’다. 소고리는 소쿠리의 사투리지만 쟁대미의 표준말이 뭔지 한동안 알아낼 수 없었다. 쟁대미. 산들에 흔하던 넝쿨식물인데 온갖 것이 다 나오는 인터넷 초록창 검색에도 쟁대미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다 넝쿨식물을 검색하고 이미지를 일일이 찾아본 뒤 알아냈다. 댕댕이덩굴이었다. 댕댕이를 쟁대미라고 했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겠지.


표준말이야 어떻든 우리의 쟁대미는 그 시절, 인동 넝쿨과 함께 시골 농가의 소소한 실내용품이나 음식을 보관하는 용기를 만드는 요긴한 재료가 되었다. 줄기를 자르고 다듬고 찌고 말리는 과정은 그렇다 치지만 목적에 맞는 소쿠리를 만들기 위해 줄기들을 배열하고 정교히 직조해 모양을 내는 과정은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용기와 받침대까지 하나로 붙은 엄마의 소쿠리는 비율과 모양이 완벽히 균형 잡혀 있었고 짜임도 탄탄해서 연약한 줄기식물로 만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견고하기까지 했다. 흑갈색 쟁대미 넝쿨과 하얀색 인동 넝쿨을 적절하게 섞어 만든 소쿠리와 채반은 소박한 무늬조차 공예품같이 예뻤다.


아내가 소장한 소쿠리와 채반 다섯 개는 인동 넝쿨로 만든 것인데 올해로 만든 지 30년쯤 되었다. 반지와 목걸이 같은 장신구를 넣어두는 아주 작은 소쿠리에서 간식을 멋스럽게 담아먹을 만한 채반까지. 글로써 그 정교한 디테일을 묘사하지 못하는 게 안타깝다. 뭐든 소중히 제 손으로 만들어 쓰던 시절, 돌아보면 그 시절 누구나 장인이고 모두가 예술가였을망정 생각해보니 정녕 아까운 사람이었다, 우리 엄마는. 세월 무상하여 어느새 예술가는 가고 소쿠리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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