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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페세 Nov 07. 2019

채소를 기억하는 법

채소를 먹는다면 그에 관한 기억을 하나쯤 만들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감자/ 

어느 여름, 산꼭대기에서 하룻밤 잤다.

황홀한 일몰을 보고 새벽에 깨어 별을 보았다. 

해발 1250미터에서 올려다본 하늘. 세상에 그렇게나 많은 별이 하늘에 있었다니. 

경이로운 밤이 지나자 아침안개가 가득 산정을 점령했다. 

문득 안개 속에서 맡아지던 익숙하고 이상한 냄새. 

역하면서도 달큼한, 무언가 식물의 줄기가 물러질 때 나는 냄새. 상한 배추 냄새였다. 

배추를 수확한 뒤 밭에 남아 버려진 배추 냄새. 그 냄새로 고랭지 배추가 이제 막 수확을 마쳤다는 걸 알았다. 

냄새는 반드시 기억을 소환한다. 

어릴 때 빗속을 달리던 기억. 먼 동네 친구 집에 다녀오다가 소나기를 만났다. 

천둥번개 요란했는데 친구와 신작로를 뛰다가 배추밭을 보았다. 수확을 끝낸 배추밭. 

빗속에 아직 쓸만한 배추들이 덩이덩이 남은 게 보였다. 

그런데 그게 뭐라고, 친구와 두 포기씩 따서는 양옆구리에 끼고 또 달렸다. 

벼락이 내리치는 빗속을. 배추를 끼고. 그게 다 뭐라고 전리품이라도 얻은 양 달리던 기억. 

버려진 배추, 그깟 게 뭐라고 빗속을 다 젖는 줄도 모르고. 

무슨 칭찬이라도 들었는지 혼이 났는지 기억도 안 난다. 

무른 배추에서 나던 들큰한 냄새와 배추를 들고 달리던 빗속의 신작로만 떠올려질 뿐.


/오이/ 

외갓집은 작은 고개를 세 개 넘으면 있었다.

한 20리쯤 되는 길이었는데, 엄마는 가끔 가는 친정을 꼭 걸어서 다니셨다. 

버스를 타자면 두 번 갈아타야 해서 번거로운 것도 있었지만 엄마의 선택은 당연한 듯 도보였다. 

입이 댓발은 나올망정 구태여 따라다녔는데, 어느 여름엔 동생과 같이 따라갔나 보다. 

집엔 아무도 없고 동구 느티나무에서 쓰르라미가 울었다. 

타는 듯한 햇볕, 동생은 툇마루에 누워 만화책을 읽고 곁에서 나는 졸음이 나른히 쏟아졌다. 

동생이 마당 비닐하우스에서 따온 오이를 씹고 있었다. 

오도독. 사각사각. 

쏟아지는 졸음, 혼곤한 감각 속에 그 소리가 너무나 달콤해 자꾸만 동생에게 오이를 먹였다. 

"하나만 더 먹어라." 

그래서 동생은 그날 엎드려 오이를 세 개쯤 먹었다. 

요즘 말로 일종의 자율감각쾌락반응(ASMR)이었겠지. 

그래서 지금도 오이를 보면 소리가 들린다. 

아사삭도 아니고 오도독도 아니고 사각사각도 아닌, 문자로 언어로 표기할 수 없는, 

싱싱한 백다다기 오이가 어린 치아에 연이어 바스라지던, 그 고소한 소리.


/감자/

감자를 굉장히 좋아한다.

감자가 어떤 때는 집에 많고 어떤 때는 하나도 없다. 

하지 감자가 잘 되면 아버지는 한 박스 가득 자식들에게 택배로 보내주시는데 

오자마자 한 번 쪄먹고는 이내 잊어버린다. 

가끔 다용도실을 치우다가 파랗게 싹 난 감자를 줍기도 한다. 

싹 난 감자는 먹지 말랬는데 굳이 먹어도 탈은 없더라. 

썩은 감자는 갈아서 물에 우리고 가라앉히고 걸러서 개떡을 만들기도 했는데, 

이런 얘기 내 아이들에게 하면 눈만 끔뻑거린다. 

시답잖은 옛날 얘기다. 그래도 한다. 내 어릴 적 이야기. 감자산꽃에 대해. 

아는 이 몇이나 될까. 이름도 어여쁜 감자산꽃. 

감자는 남의 밭에서 캔 것이라야 좋다. 한 군데서 많이 파면 들키니 몇 고랑 봐가며 한 소쿠리쯤 캔다. 

개울가 돌을 모아 아궁이를 만든다. 불을 땐다. 

돌이 달면 벌건 숯 가득한 아궁이에 칡잎으로 싼 감자를 넣고 돌집을 무너뜨린다. 

흙을 덮고 쑥대와 칡순을 베어 두툼히 얹고 다시 흙을 덮고 잘 밟아 김이 빠지지 않게 마무리한다. 

그 다음 개울에 들어가 한 시간쯤 물장구 치며 논다. 

그러면 우리는 금방 허기가 졌고 흙무덤 뜨거운 김 속에서 감자는 타지도 않고 잘도 익는다. 

내가 아는 가장 근사한 감자요리법. 감자산꽃.


/케일/

털이 많은 동물을 싫어한다.

하지만 털이 없는 것은 더 끔찍하다. 

예를 들어 뱀이나 지렁이나 애벌레 같은 것. 

번데기를 절대 먹지 않는 이유도 누에가 고치에 들어가 변태한 것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자라서 어여쁜 나비가 되는 신비한 존재지만 그렇다 해도 애벌레는 싫다. 

꿈틀거리는 굵디굵은 나비 애벌레는 보는 즉시 비명이 나온다. 

주인집 누나는 예뻤지만 쌀쌀맞았다. 

기름기 줄줄 흐르는 느끼한 면상의 남자와 열애 중이었는데 

야간자습에서 돌아와 대문을 열 때마다 둘이 마당에서 부둥켜안고 입을 맞추는 장면을 번번이 목격해야 했다. 

마당에는 텃밭을 가꿨는데 발랑 까진 주인집 누나가 거기 케일을 심었다. 양배추인가 했는데 케일이었다. 

어찌나 케일을 애지중지하는지 아침마다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나와 애벌레를 잡았다. 

내가 마당에서 세수를 하는 동안 이슬 젖은 이파리를 들춰 벌레를 잡는데, 

한 마리 잡을 때마다 “잡았다 요놈”하고 괴성을 지르는 통에 내가 벌레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하늘색 잠옷속에 어른거리는 누나의 비쩍 마른 몸매도...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집어 든 초록색 투명한 애벌레. 

누나는 살기 어린 눈으로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원수나 되듯 노려보다 

바닥에 던지고는 매몰차게 슬리퍼 바닥으로 짓이겨버리곤 했다. 

예쁘고 잔인한 누나. 케일은 몸에 좋은데, 먹을 때마다 애벌레 맛이 난다. 

파랗고 투명하던, 싫으면서도 불쌍한 애벌레의 체액 맛.


채소를 먹어야 한다면

그에 관한 기억 하나쯤은 만들어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채소를 먹여야 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채소는 그다지 맛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어도 상관 없지만. 내 생각은 굳이 그렇다.



사진: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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