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몰하는 시간

많은 남자들이 목공을 로망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by 수페세

언제부턴가 가끔 마른 풀 냄새를 맡는다. 운전을 하다 자판을 두드리다 또는 길을 걷다 언뜻 코끝에서 냄새를 느낀다. 어떤 그리움의 냄새라 짐작했다. 풀이 말라가는 냄새를 좋아한다. 아늑하고 고소하다. 한강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공원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한가로운 시간의 냄새. 아, 지금 내겐 그런 느슨한 순간이 필요하구나. 몸이 먼저 일러주고 있어. 휴식이 필요해. 그렇게 낭만적으로 생각했건만, 이비인후과 의사는 내게 냄새의 근원이 부비동염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실망과 함께 알게 된 건 언제나 마음은 달콤한 딴짓을 꿈꾼다는 사실. 멋진 삶에는 얼마간 일탈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걸 정당화할 핑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일 뿐. 효율과 유용성이 추앙받는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늘 시간이 없고 시간에 쫓긴다. 그래서 시간 낭비엔 자비가 없다. 그러니 딴짓을 위해서는 완벽하고 그럴듯한 핑계가 필요하다.


한동안 주말 오전이면 차를 몰고 일산에 가곤 했다. 목공을 배우기 위해서였는데 뭔가 쓸모 있는 걸 만들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알량한 인내심의 한계를 알기 때문에 이유가 거창할 수 없었다. 그저 뭔가에 골몰해 보고 싶었다. 깎고 자르고 문지르는 단순 동작의 반복.


목공을 많은 남자들이 로망으로 꼽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해야만 하는 너무 많은 생각을 잠시 멈추기 위해 해보는 딴짓, 단순한 일을 반복하고 싶은 욕구. 그래서 누구는 머리가 하얘지도록 트랙을 뛰고 누구는 강물에 허리를 담그고 저물도록 루어 캐스팅을 무한 반복한다. 러닝도 낚시도 좋지만 목공 하는 남자는 왠지 폼 난다. 잘 하면 도마 하나, 서랍장 하나쯤은 생길 수 있으니까 아내 몰래 얼마간의 비용과 시간을 낭비해 보기로 했다.


해보면 알게 되지만 뭐든 기대와 실제는 다르다. 다짜고짜 톱질, 대패질을 해대고 싶었으나 시작은 숫돌이었다. 끌과 톱, 대패로 이뤄진 공구의 날을 갈아서 세워야 했다. 바른 자세와 일정한 각도로 정교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동작은 일종의 수도 행위였다. 날은 세우되 예민한 마음은 깎고 밀어서 뭉툭하고 평평하게 만들기.


김훈은 <현의 노래>에서 연장 날을 세우는 일을 ‘없음의 추구’라고 표현했다.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없음을 지향하는 것. 있음과 없음의 경계. 있는 것을 정교하게 없애가는 과정. 그게 날을 세우는 일의 본질이다. 6주 동안 골똘히 날만 세웠다. 도무지 생각이란 것이 필요 없었다. 결국 손에 쥔 건 호두나무 도마 하나였지만 날을 다 세우고 얻은 건 그것만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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