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것 같다면

길을 찾으려 애쓸 필요는 없어. 지금도 길 위에 있으니까.

by 수페세

회의 중인데 창밖으로 무언가 휙 지나간다.

발아래 5층쯤 높이로 스쳐간 그것은 분명 황조롱이였다. 정확히는 날고 있는 황조롱이의 등을 본 것이다.

살면서 비행하는 새의 등을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게다가 서울 강남 한복판의 황조롱이라니? 회의를 중단하고 방금 본 신기한 사건을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한데 아무도 믿어줄 것 같지 않아 입을 꾹 닫았다.

황조롱이가 무엇이냐. 조류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떻게 아느냐. 까치나 비둘기였겠지. 하지만 천만에. 비둘기와 황조롱이는 날갯짓도 비행 궤적도 확연히 다르다. 어떻게 다른지 말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보면 안다. 오래 봤으니까.

회의를 마무리하는 20분 이내, 새는 빠른 속도로 빌딩 사이를 두 번이나 왕복했고 그러는 동안 비행하는 새가 황조롱이라는 게 곁눈질만으로도 명백해졌다. 새는 건너편 건물 7층 환풍구 앞에 잠시 정지비행을 하다가 오른쪽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 다시 나타나리라. 황조롱이는 텃새이고 아마도 이곳은 반경 10킬로미터를 사냥터로 삼는 도심 맹금류의 영역일 것이므로. 운이 좋다면 내일이라도 그 새의 나는 등을 또 보게 되겠지. 공중을 나는 새들도 저마다 자기 길이 있다.


1만 미터 상공에서 밖을 내다보면 대개 비행기는 구름 위를 날고 있다.

날고 있는데 정지된 화면 같다. 끝없는 층적운은 평탄한 융단 같고 강렬한 햇빛은 청명하기 그지없어 마치 한가한 주말 오후 뒤뜰 벤치에 앉은 기분이 든다. 안온한 구름밭을 지나 발밑 시야가 뚫릴 때, 가끔 저 아래 뭔가가 맹렬한 속도로 지나친다. 항로를 비껴가는 다른 비행기다.

하늘에 이렇게나 많은 비행기가 떠 있는데 어떻게 서로 충돌하지 않고 날아다닐까, 한때 그게 몹시 궁금했다. 공상과학 소설에 빠져 살던 동생이 그 비밀을 풀어주었다. 형, 그건 말이지. 비행고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야. 각자 정해진 고도가 있거든. 이렇게 중요한 걸 하찮은 듯 알게 되다니. 지상의 길과 천상의 길은 이렇게 차원부터 다르구나 생각했다.



한동안 주말이면 진관사 계곡에 갔다.

낙엽 위에 눈이 오고 녹고 또 쌓이는 동안 같은 길을 계속해서 오르내렸다. 걷는 동안 발견했다. 밤에만 가만히 걷는 짐승의 길. 눈에 금방 띄지 않는 산허리, 상수리나무 뒤 30도 상향, 일렬로 눌린 낙엽의 표식을 보았다.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고라니 흔적이 분명하다.

모든 짐승은 다니던 길을 고집한다. 그래서 때때로 사람에게 잡혀 짧은 명을 다한다. 수많은 로드킬도 그런 이유이고 작은 짐승이 올가미에 걸려드는 것도 천진한 외길 습성의 비참한 대가다.


낚시를 오래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게 있다.

보이지 않는 물속 생명체를 낚아내는 비결은 비싼 장비나 특별한 미끼, 챔질의 기술 따위가 아니라 물고기의 길목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 어도라 하고 낚시 전문용어로는 포인트라고 부르는 곳인데 문제는 물고기가 언제 이곳을 통과하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낚시꾼은 길목에 진을 치고 앉아 언제까지고 때를 기다리는데, 그 모습은 영락없이 세월 낚는 미련한 한량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진정한 고수의 길은 온갖 의심과 한심한 오해의 눈초리를 견뎌내는 지구력에 있는지도 모른다.


한동안 나의 기도 제목은 길을 보여주십사 하는 거였다.

오래 익숙하던 직업의 행로를 벗어났을 때 예기치 않은 암담함이 찾아왔다. 발 앞에 아무것도 없고 완전히 길을 잃은 것 같았다. 새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염원했으나 응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길에 관한 잠언은 언제나 수수께끼였다.

거창한 결심과 많은 계획, 망설임 끝에 겨우 시도해본 일, 결국 한 발 내딛지도 못한 걸음. 주시하고 두리번거려도 이것이다 싶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이제야 아는 바, 인생이란 결코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그렇다 한들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것. 나쁘긴커녕 언제나 가장 좋은 길이었다는 것.

나는 항상 길 위에 있으므로 가끔은 내가 지금 어디쯤 서 있는지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는 것. 제일 중요한 것은 언제나 맨 나중에 알게 되는 법이다.


십수 년 만에 한강이 통째 얼어붙은 겨울이었다.

집 근처 하류에는 잠실에서부터 떠내려온 얼음더미가 깨져서 녹고 다시 얼어붙어 작은 빙하를 보는 것처럼 장관이었다. 마음도 빙하기 같던 어느 날, 성산대교를 남쪽으로 건너는데 라디오에서 문득 시가 흘러나왔다. 이성부 시인의 ‘봄’.

젊은 날, 오래 좋아해서 거의 암송할 수도 있는 시를 나른한 목소리의 아나운서의 낭송으로 다시 듣는 봄.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마지막 구절을 가만히 따라 읊다 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언제까지나 동지에 머물 것 같던 철옹성의 계절.

그래도 시간은 기어이 봄의 길목에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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