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뜻 모를 일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없거든요.

by 수페세

나는 그해 4월 입대했다.

서울올림픽이 끝난 다음 해였고 세상은 대체로 안전해 보였다.

아버지의 뜻이었다. "올림픽이 끝나거든 군대 가거라. 국가 대사가 있으면 군이 힘든 법이다."


3학년까지 마치느라 친구들 휴가 수발을 다 들고 늦은 나이에 입대했는데, 막상 내가 휴가를 나오니 닳고 닳은 예비역 친구들은 술과 밥을 사지 않으면 놀아주질 않았다. 배은망덕한 인간들.

억울한 건 또 있었다. 육군은 훈련이 고되고 해군은 물이 위험하니 공군이 좋겠다고 결정하신 아버지 뜻에 따라 2000미터 달리기를 두 번이나 하고 겨우 공군이 되었는데 비행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병과를 받았다.

개와 훈련하고 개와 근무를 서는 군견병이 된 것이다. 군견병이라 억울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많아 억울했다.

육군과 달리 만18세만 넘으면 시험을 봐서 입대할 수 있던 공군은 도처에 어린 사병 천지라 내가 만난 내무반 고참 20명 전원이 나보다 어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를 때리던 어린 고참은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다.


내 개 이름은 자니였다. 7살 셰퍼드. 똑똑하고 용맹했다.

군견병이라고 하자 무식한 누군가는 대한민국 군대에서 왜 외국 개를 군견으로 쓰냐며 힐난했다.

그럴 땐 으스대며 이렇게 말하곤 했다. 영리하고 충성스럽다고 진돗개를 군용으로 쓰면 주인 제대할 때 죄다 따라 도망칠 거야. 셰퍼드는 밥만 몇 번 가져다주면 바뀐 주인을 금방 알아보거든.

그러고 보니 어느 개가 더 영리한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고달픈 신참 생활을 개와 함께 시작했고 길었던 군 복무를 자니와 함께 마무리했다. 개는 주인의 기분을 알았고 감정을 나눌 줄도 알았다. 제대 전날 밤, 자니를 붙잡고 울던 기억이 난다. 내 인생에 왜 개를 만나서... 다시는 개 따위 키우지 않으리라 다짐한 것도.


군 생활은 대체로 분주하고 고달프고 울적했지만 그나마 좋은 시간은 그때였다.

자니와 들판에 있는 초병의 시간. 늦봄이거나 초가을이면 더 좋았다.

산속의 막막한 비행장. 밤이 되면 묘지처럼 변하던 이글루, 으스스한 격납고. 밤의 활주로에 몇 시간씩 서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개와 중얼거리는 것도 잠시, 그리워할 애인도 없고 잡생각도 어지간히 하다 보면 지겨워졌다.

고참 몰래 라디오를 가져가서 한쪽 귀에 이어폰을 꽂고 듣기도 했는데 어느 날은 당시 초보 DJ이던 배철수 씨가 음악캠프 멘트를 더듬거리던 게 기억난다.

라디오도 시들해지면 아직 따뜻한 시멘트 활주로에 벌렁 누워 하늘을 보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좋았다. 비 갠 뒤면 비행장 하늘에 우주의 별이 모조리 집합한 것 같았다. 한가운데 선명한 은하수가 위아래로 흐르고 오리온이며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과 시리우스. 모르던 별자리를 하나씩 짚어보곤 했다.

인류가 별자리를 발견한 이래 별들은 어떻게 수천 년 동안이나 한 치 오차도 없이 저토록 정밀하게 제 길로 운행하는지, 생각하면 절로 경외감이 솟곤 했다. 홀로 누워 고요히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단지 관찰이 아닌 기적을 체험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어떤 미지의 대상과 만나는 경이로운 경험 말이다.


활주로 초병 근무를 서고 있던 어느 한 때가 또 생각난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한 시간도 못되던 그 이상하던 순간. 활주로 너머 노랗게 시든 해가 손톱만큼 걸려 있고 멀리 벌판을 가로지르던 장교용 흰색 액셀 승용차 꽁무니의 뿌연 먼지.

어디선가 길게 트럼펫 소리가 들려왔고 약간 습하고 텁텁한 공기의 맛과 온통 주황으로 물들던 풀밭. 발아래 수풀 사이로 진분홍 꽃이 보였다. 마구 피어나던 무수한 꽃 무리 안에 내가 긴 그림자로 꽂혀 있었다.

기우는 햇빛 속의 흥건한 비애감이라니. 황홀하고 외롭던 순간. 여기서 인생이 멈출 것만 같은, 이유도 모르고 홀로 버려진 느낌. 어쩔 줄 모르겠던 감정의 과잉을 따라 내 청춘의 절정이 지나던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꽃 이름은 패랭이꽃이었다. 제대한 뒤 나는 그때를 회상하며 시를 한 편 썼다. 상도 받았다.


패랭이꽃을 지난 겨울 초입, 다시 만났다. 펄펄 내리던 첫눈 속에서.

이 계절의 패랭이꽃이라니, 기이하지만 분명 그 꽃이었다. 신촌의 대학병원 화단 곁을 지나는데 때 이른 함박눈이 내렸고 수억 마리 흰 나비 떼처럼 날리는 눈발 속에 분주히 걸음을 옮기던 내 눈을 잡아챈 작고 선명한 진분홍. 고개를 돌렸을 때 마치 작은 등이 반짝 켜진 것 같았다. 벌도 나비도, 봐주는 이도 없는 이 추위에 어떤 이유로 피었는지 짠하고 기특했다.


세상에는 뜻 모를 일이 많다.

눈 속에 여름꽃이 피듯.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비현실적 일.

알고 보면 엄연히 있는 일이다. 만일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싶은 사건을 만났다면 이렇게 여기면 쉬우리라.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은 없다고. 그 결말은 온전히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에 달렸다고.

그 겨울, 눈 속에서 만난 패랭이꽃이 용기와 함께 가르쳐준 작은 지혜였다고 나는 지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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