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니면 언제?

'더 나은 다음'에 대한 기대가 진짜 즐거움을 망치는 건 아닐까

by 수페세

욕조 거품에 발끝이 솟아 있다.

그는 우아한 음악과 함께 책을 읽으며 고풍의 호텔에서 여유롭게 반신욕 중이다.

물론 목욕 거품은 향긋하겠지.

물 묻은 손으로 찍었을 스마트폰 사 진 만으로도 분위기가 사뭇 럭셔리하다.

영혼 없이 좋아요,를 누르고는 은근한 질투심에 입맛을 다신다.

좋구먼, 이런 출장. 룸서비스로 조식을 먹은 뒤 느긋한 오전의 뜨끈한 반신욕이라니.

콧노래 아니라 하이쿠라도 한 편 읊겠네.


직업상 출장이 잦을 때 가끔은 이국의 호텔에서 이런 순간을 누리곤 했다.

"호텔 욕실에서 뜨거운 물 맞으면서 날면도하는 기분 알아? 정말이지 특별하거든."

상사가 출장 품의서에 사인을 하며 부추긴 말을 믿고 날면도기를 챙겨 나도 따라 해 보았다.

샤워기를 맘껏 틀어놓고 면도거품 잔뜩 묻혀 오래오래 수염을 밀던 시간은 휘파람 불만큼 폼 나기도 했다.

번거롭지만 뭐, 경험이니까.

면도 자체보다 낯선 곳, 편의가 제대로 갖춰진 고급 호텔 욕실이라는 점이 특별한 감흥이었을 테다.

그러니까 기분 탓이란 말.


동료 중 몇몇은 호텔 풀장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누구는 조깅을 하려고 출장 트렁크에 반드시 러닝화를 따로 챙긴다 했다.

평소에는 엄두를 못 낼 호텔에서의 아침 수영이나 낯선 도시에서의 러닝도 독특한 경험과 성취감, 그리고 은근하고 노골적인 과시의 기회를 선사한다.

SNS라는 즉석 인증 미디어가 창궐한 오늘엔 더욱 그렇다.

나로 말하면 수영복과 러닝화를 챙기는 부지런 대신, 너른 침대에서 오래오래 뒹구는 게으른 오전을 사랑한다.

혹시 몰라 가져 간 책을 들춰보기도 하지만 괜히 한두 장 넘기다 말고 그냥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낸다.

(독서란 모름지기 해변 야자수 그늘, 해먹에서라야 제격이지.)


암막 커튼을 반쯤 친 뒤 베개를 삼단으로 쌓고 한껏 게으르게 기대 천장에 눈을 대고 동공을 흐린다.

소리를 줄인 TV에선 축구 중계가 현지어로 재방송되고 있고.

스케줄 없는 출장지의 오전, 나태함 말고 더 쓸모 있는 일이란 없어 보이므로.

그러다 일어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동네를 한 바퀴 어슬렁거려 보기도 한다.

익숙한 여행자인 척 한껏 느린 걸음으로. 거봐, 나오길 잘했지, 세뇌하며 한산한 쇼윈도 골목을 기웃거린다.

이건 출장지에서만 누리는 호사야, 그렇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가?

어떤 순간을 그리워하는가?

생각해보면 누구나 재미와 즐거움에 대한 강박을 갖고 있는 듯하다.

뭘 하든 반드시 재미를 느껴야겠다는 것. 다음은 지금보다 당연히 더 즐거워야 한다는 것.

더 나은 재미가 보장되리란 기대 말이다.


하지만 꼭 그래야 옳은 걸까?

이것 말고 다른 것. 이번 말고 다음번에 대한 기대와 집착이 진짜 즐거움을 망치는 건 아닐까?


*****


미국의 한 대학에서 전화 심리 테스트를 진행했다.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근무 중입니다. 기분은요? 지겹죠, 일이 즐거울 리가 있나요? 그럼 뭘 하고 싶은데요? 퇴근 후 친구들과 한잔할 시간만 고대하고 있죠. 그럼 두 시간 후에 전화를 걸게요. 두 시간 후. 지금은요? 다들 재미없는 얘기만 하네요. 따분해서 여자 친구나 만나야겠어요. 그럼 한 시간 후에 전화드리죠. 여자 친구와는 어떤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는 즐거운가요? 말도 마세요. 약속에 늦었다고 아까부터 짜증내고 있네요. 지난번 생일선물 불만까지 섞어서요. 피곤해서 얼른 집에 가 쉬고 싶어요. 역시 혼자 있는 게 최고예요. 그럼 지금은요? 여전히 지루해요. 집에서 혼자 편하게 쉬는데도요? 티브이도 재미없고 딱히 좋은 게 없네요. 그럼 뭘 하고 싶나요? (마침내 이런 대답.) 차라리 빨리 아침이 되어 출근하는 게 낫겠어요. 일이야 하는 만큼 성과가 나오고 보수도 따라오니까요.


이 테스트 결과가 주는 교훈은 심플하다.

우리 대부분은 언제나 현재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

그러므로 현재에 집중하라는 것. 지금의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

이 순간이 즐겁다고 스스로 자꾸 생각하면 실제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더라는 것.

촌스럽게 현재의 삶을 사랑하세요, 뻔한 교훈을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뇌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뇌는 두개골이란 헬멧을 쓰고 어두운 곳에 가만히 웅크리고 있다.

오직 외부 세계의 정보는 몸의 감각을 통해서 전달받는다.

뇌는 실제적 진실과 상관없이 오직 전달되는 정보만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판단한다.

따라서 어떤 일이나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 감정과 생각이 재미없다, 하기 싫다,라고 부정적 반응을 보이면 뇌는 자기 방어 기제가 발현되어 그 일을 하지 않는 쪽으로 기능을 최소화시켜 버린다.

반대로 좋다, 재미있다, 즐겁다고 생각하면 뇌는 드디어 능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판단해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럼으로써 현재 순간을 실제로 재미있고 즐겁게 느낄 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이건 뇌과학자들의 주장이다.


이 글을 시작할 때, 나는 원고를 어서 끝내고 저녁 자전거를 타려는 생각뿐이었다.

이맘때 한강공원의 마른풀 냄새는 기가 막힐 것이라서.

그런데 예상과 달리 밤이 깊었다. 기대는 없어졌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지금은 어떠한가?

복잡한 뇌과학 이론은 되새길 필요 없이 이 순간 자체로 느긋하고 즐거운 시간이길.

이만 노트북을 닫고 '발행' 버튼을 누르려는 지금 내 기분처럼.


- Photo by Zachary Keimig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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