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질문 일기 10화

철없는 관계

우리는 함께하면 할수록 나잇값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철이 없어진다.

by 이린
46. 죽고 나서 딱 한 가지 기억만 가져갈 수 있다면 가져가고 싶은 기억은 무엇인가요?


나는 환생론을 지지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인간은 사후 생전의 모든 기억을 망각하기 위한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환생할 수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만약 그런 게 실재한다면 나는 어떤 기억을 가장 오래 붙잡아두고 싶어 할지 생각해 봤다. 딱 한 가지가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보다, 이렇게 고민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보면 나는 그동안 행복에 기반한 그리움이 가미된 미련들을 내 기억 곳곳에 심어뒀나 보다.


그중에서도 딱 한 가지만 고를 수 있다면 나는 우리 언니를 기억해야 할 수밖에 없다. 선택에 대한 기준은 추후에 내가 기억을 잊었다는 걸 자각했을 때 가장 후회가 큰 것. 나에게 유일한 가족이 누구였는지, 내가 가장 소중하게 안고 가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평생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만 하고, 꼭 렇게 하고 싶다. 언니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다.



47. 진정한 친구란?


나에겐 십 대의 초반부터 쭉 함께 해온 친구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친구들은 매년 서로의 생일과 새해를 함께 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무언가를 바라지도 않고 계산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서로가 곁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가끔 연락이 뜸해도 다 이유가 있겠거니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다 오랜만에 얼굴을 본 날이면 그간 떨어져 있던 시간이 무색해질 만큼 우리는 충분히 가깝다. 성격상 남 일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우리가 서로의 일이라면 신경이 곤두서고, 어느 한 명이 축하받아야 할 일이 생긴다면 오히려 진심 어린 축하보단 농담이 가득한 저주를 퍼부으며 나이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 우리는 함께하면 할수록 나잇값을 하지 못하고 점점 더 철이 없어진다.


꾸밈 하나 없이 가까운 이 관계성은 항상 서로를 처음 인연이 시작됐던 십 대의 초반에 머무르게 한다. 내가 생각하는 친구란 그렇다. 우리는 이 유대감을 입에 직접 올리지 않아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네들이 정말, 정말로 징그럽다.



48. 지금 당신에게는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요?


나는 모든 운이 인복(人福)에 몰려있는 사람이라 과분하게도 좋은 사람들을 곁에 많이 두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필요로 한다기보다 더 단단한 나 자신이 필요하다.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지만, 결국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사랑의 본질은 '자애(自愛)'라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누구도 진심을 다해 사랑할 수 없다.


지독한 첫사랑을 끝으로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나를 사랑하는 능력이 부족할수록 이별의 후폭풍이 더욱 거세진다는 것이다. 나를 가장 아름답고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었던 이가 하루아침에 없어짐과 동시에 나는 별 거 아닌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작 한 사람이 내 곁을 떠났다고 나를 잃어버리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젠 만남과 이별 자체에 많이 무뎌져서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더 강한 내가 필요하다.



49. 남에게는 미처 말하지 못한 나의 비밀이 있나요?


- 告白 -


나는 가끔 잔인한 생각을 해요. 비위도 약하고 겁도 많은 주제에 종종 치미는 화를 주체하지 못할 때면 공개적으로 말하기 힘들 만큼 잔인한 생각들을 합니다. 나는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당신들을 갈기갈기 찢어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로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방 문을 굳게 닫고 있어도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당신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치가 떨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나의 행위들을 그저 정당방위로 치부하는 내 모습이 더 잔인하다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당신들을 아직도, 그리고 평생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어떨 땐 나의 몸 일부에도 그런 상상을 빗대어 스스로를 몇 번이고 찢어발긴 적도 있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항상 웃고 밝고 활기찬 사람이지만 가끔씩 그렇게 더러운 생각들을 품고 사는 내가 싫어집니다. 역겹고요.


감정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을 죽도록 싫어하고 그를 닮기 싫어서 아주 진절머리를 치는데. 정작 똑같이 그러고 있는 나 자신을 볼 때면 또 한 번 나를 찢고 싶습니다. 이런 반복이 나를 불안정하게 만들어요. 앞으로 나는 또 얼마큼 그들을 죽이고 나를 찔러댈까요.



50. 해가 뜰 때 하늘, 해가 질 때 하늘, 새벽하늘 중에서 어떤 하늘이 가장 편안해진다고 생각하나요?


내가 해 지는 하늘을 좋아하는 것은 드디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하늘은 나를 애태우고 시간을 붙잡고 싶게 만든다. 새벽은 곧 새로운 하루가 머지않았다는 거니까. 해가 뜰 때는 또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어 활기차지만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해가 지는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앞으로는 점점 더 평안한 순간들로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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