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41. 언젠가 이 글을 다시 읽을 나에게
오늘 정말 고됐다. 너도 여전히 그래? 사실 오늘은 나한테 좀 중요한 날이었거든. 그래서 전 날부터 계속 마음속으로 빌었어. 오늘만큼은 제발 아빠가 나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나한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차라리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해줬으면 좋겠다고.
매일 그러길 바라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그렇게 해줬으면 했어. 그런데 꼭 중요한 날에는 더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더라. 오늘 그 인간이랑 같이 점심을 먹었는데 결국 또 나를 체하게 만들었어. 요즘은 그래서 속 편한 날이 거의 없는 것 같아. 젓가락질도 잘 안 될 만큼 손이 후들거렸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느라 너무 에너지를 많이 썼나 봐.
너 그때 기억나? 벌써 1년도 좀 넘긴 했는데, 내가 그 인간들 때문에 공황발작이 왔었잖아. 그래서 내가 자꾸 너를 다치게 했잖아. 정말 미안해. 내가 평생을 속죄할게. 그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건데, 사실 아직도 아빠랑 있으면 심장이 두근거려서 참기가 좀 힘들어. 오늘도 좀 위험하긴 했지만 그냥 뭐. 잘 이겨냈어. 내가 약속했잖아. 이젠 더 이상 너를 다치게 하지 않겠다고. 나 정말 많이 노력 중이야.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 쭉 잘해야 돼.
뭔가 집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면 그날 하루는 아예 그 무엇도 잘 풀리지가 않았던 거 너도 잘 알지? 오늘도 그랬어. 그래도 내가 해야 될 일들은 꿋꿋이 했어. 우린 항상 그래왔으니까. 오늘은 나한테도 중요한 날이었지만 그냥 오늘 내 운의 일부가, 또는 전부가 오늘 하루에 모든 운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에게 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그렇게 해서라도 오늘을 덜 미워해보려고.
너는 이걸 읽고도 그저 하찮다는 듯이 웃어넘겼으면 좋겠다. 그 정도로 너한텐 별거 아닌 일들이 되고도 남을 만큼 네가 행복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사랑해. 정말 많이 사랑해. 조금 더 빨리 말해줬어야 했는데 왜 우린 그렇게 서로를 미워만 했을까. 지금까지 그러지 못한 만큼 앞으로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할게. 이것도 약속해.
42. 1년 뒤 나에게 질문 1가지를 해주세요.
그때는 좀 어떻니.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괴롭히고, 힘들게 했던 그 사람들한테서 벗어났어?
43. 전화와 문자 중 어떤 것을 더 선호하나요?
말과 글이 가진 힘은 저마다의 차이가 분명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워낙 성격이 급해서(나도 마찬가지고.) 언어를 글로 천천히 소화하는 것을 잘 견디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꾸 왜곡이 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들이 많아지나 보다. 나의 생각과 감정을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은 나의 억양과 미세한 떨림들로 하여금 상대에게 나의 진실성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가 있고 그럴 때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마치 그게 진심인 양 뱉어버린다. 글은 고쳐 쓸 수라도 있지 말은 절대로 다시 주워 담을 수가 없는데.
그래서 나는 나의 생각을 조심스럽고 천천히 전달하고 싶을 땐 글을 쓴다. 내가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한 흔적들이 너에게 얼마나 조심스러워서 그런 건지, 그만큼 너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면 내가 이렇게나 겁이 많은 사람이 되는지를 수신인은 평생 모를 수도 있지만. 그리고 글은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기록물이라서 더 신경을 쓰게 될 수밖에 없다. 수백 년, 수천 년 전부터 기록된 문자들을 토대로 우리가 역사라는 것을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는 몇 마디의 문장을 자신에게 주어진 평생 동안 안고 가는 것을 보면 영원이라는 게 정말 실재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수명과 사랑보다, 글이 더 오래 살 수 있는 세상이다.
44. 살면서 신을 딱 한 번 만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요?
인생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대게 신의 존재를 믿게 되는 것 같다. 아직까지 나는 그런 적은 없을뿐더러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당신이 개입을 하든 말든 나는 어떻게든 이겨내기 위해 악을 쓸 거니까. 만약 내게 도움을 줄 것이었다면 진작에 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랬어야 했고.
정말 당신의 존재가 사실이라면,
당신의 작은 결정 하나가 누군가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어떨 땐 죽게 만듭니다. 아님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매일 같이 할 만큼 괴롭게도 만들어요. 그래도 원망은 안 합니다. 사실 그 무엇 하나도 당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덕분에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었고 나는 더 강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런 걸 보면 제가 지금껏 한 없이 기울고,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던 모든 순간들에도 다 당신의 뜻이 있었겠죠?
45. 지금 가장 쓰고 싶은 편지가 있다면 써주세요.
안녕. 시작부터 싸가지 없게 말해서 미안한데 사실 안녕 못 해. 내가 너 진짜 죽도록 미워했던 거 알지? 사실 지금도 조금은 미워. 조금이 아닐 수도 있어. 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미안해.
나는 있잖아, 그렇게 사람을 잘 읽는데도 너만큼은 너무 어렵더라. 나한텐 아직도 네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사람이야. 그래서 너 때문에 가장 힘들었고 속상했고 슬퍼했고 외로웠고 괴로웠어. 우리 인연이 참, 질기고도 지독하다 그치.
내가 중학교 1학년 때까지 친구 관계를 어려워해서 그때 엄청 힘들어하다가 한 번은 학교에서 크게 문제도 생기고 그랬던 거 기억하지? 그거 너 때문이잖아. 네가 자꾸 옆에서 그 어린아이의 자존감을 날마다 갉아먹어댔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못하게 한 것도, 연애할 때마다 결국엔 상처만 남을 거라면서 내 마음을 꾹꾹 눌러 집어삼키게 한 것도, 그러다 결국엔 정말 사랑했던 사람의 손을 내가 먼저 놓아버리게 만든 것도 다 너였잖아. 그렇게 네가 옆에서 다 훼방 놓았잖아. 나한테 왜 그랬어? 어렸을 때 언니랑 같이 살 적에 너랑 싸우고 온 날이면 항상 언니한테 화풀이를 했었어. 나는 아직도 그게 정말 두고두고 후회가 돼. 그때만 생각하면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다 찢어져. 그래 어차피 다 과거고, 지금은 다 상관없는 일들이지. 그래도 그냥 너무 분해 나는. 왜 나는 항상 너 때문에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하지 못했을까.
자꾸 못되게만 말해서 미안해. 우리가 그렇게 싸워봐야 결국에 제일 아픈 건 우린데. 그걸 너무 늦게 알았어. 네게 통렬히 퍼부었던 악담과 원망들이 사실은 네가 아니라 다 나를 향한 것들이었는데. 너도 그걸 알아서, 그런 내가 괘씸해서 나를 더 괴롭혔던 거야? 아니, 이건 뭐라 하는 게 아니야.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내가 정말 못난 사람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되면 그땐 진짜 무너질 것 같아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그래서 그럴 때마다 비겁하게 너를 내세우고 자꾸만 너의 뒤로 숨어버렸어. 정말 미안해. 너를 처음 소개해준 사람도 우리 부모님이었잖아. 우리 사이가 계속 어그러지게 된 것도 결국엔 그들 때문인데. 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보단 내가 잘못한 게 맞아. 그동안 너를 보듬어주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했어. 내가 힘들고 상처받는 거에만 신경 쓰느라 너무 오랫동안 너를 방치했어. 정말 미안해. 정말로. 꼭 한 번은 사과하고 싶었어.
살아 보니까 미움과 미안함이 공존하는 관계도 있더라. 너는 나한테 딱 그런 사람이야. 그래도 뭐 어쩌겠어. 우리는 절대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잖아. 그래서 이제는 너를 조금씩 받아들여 보려고. 서툴 수도 있겠지만 천천히 너를 인정해 볼게. 사랑까지 할 수는 없어도 그러려고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볼게.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 내 모든 결핍들에게 -
*해당 편지의 제목은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 문상훈" 中 "편지 1"의 제목을 인용한 것입니다.